[문화人칼럼]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문화人칼럼]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중도일보 2024-07-10 17:06:12 신고

김홍진 교수
김홍진 교수.

고형렬 시선집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창비)를 읽었다. 당연히 이 선집에는 첫 시집 표제작 「대청봉 수박밭」이 실려 있다. 20대 초반 끔찍했던 시절 이 시집을 읽은 기억은 아직도 강렬하다. 그 기억은 "아, 이렇게도 현실원칙을 교란할 수 있구나" 하는 위반의 쾌감 같은 데서 오는 것이었다. 자끄 랑시에르에 따르면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의식이나 메시지를 통해 생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감각의 분배 체계를 교란하고 재배열하는 미적 기능과 효과에서 온다.

고형렬은 "청봉이 어디인지,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면 이 여름밤"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이 있는 대청봉으로 함께 가자고 잡아끈다. 설악산 대청봉엔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그곳엔 또 수박밭이 있다. 이 진술은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허무맹랑한 진술이 거짓말 같지 않은 이유는 "상상을 알고 있지"와 "상상력을 걷는다"는 진술 때문이다. 여름밤 대청봉에 눈이 내리고 수박밭이 있다는 진술은 우리의 일상적 감각과 인식 체계를 교란 전복함으로써 심미적 정치성을 발생시킨다.

상상은 일상의 문법을 해체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힘이다. 시인은 뜬금없이 한여름 대청봉에 눈이 펑펑 내린다는 둥, 그곳에는 수박밭이 있다는 둥 너스레를 떨다가 갑자기 그곳이 '백두산'이었으면 상상한다. 그리하여 꿈이나 달 같은 수박, '기막힌 수박만 한 눈송이'가 무엇을 환유하는지 부연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삭정이 뼈처럼 죽어 있던 골짜기"로 은유한 폐색된 현실이 가로막은 꿈의 금지된 땅으로 월경(越境)을 감행해 유영을 즐긴다. 그리하여 이 상상의 유영은 우리의 모순적 현실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함의를 내포한다.

고형렬의 많은 시가 보여주는 상상의 월경은 현실의 검열과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하는 문학적 위장으로 기능한다. 분단 이후 현실이 호명을 금지하는 곳으로의 월경은 따라서 제도나 권력 기구 등이 표상하는 단일한 질서와 고착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탈중심성으로의 확장을 환기한다. 그는 경계를 떠도는, 그의 말대로 분열증상 혹은 미도착 상태에 있다. 이런 그에게 정치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제도적 폭력의 현실이 금지된 영역으로의 월경을 감행하게 만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초현실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은 야전병원에서 한 병사를 만난다. 이 병사는 전쟁을 현실이 아닌 허구라 믿는 친구다. 그런 탓에 포탄이 떨어지면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마구 뛰어다니길 즐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멀쩡했다. 이게 전쟁은 허구라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전쟁을 상상의 허구로 믿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쇼크로 죽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그가 현실을 부정하고 상상의 세계로 도피한 것은 참혹한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였다.

고형렬이 보여주는 월경의 상상 역시 브르통이 관찰한 병사에서 보듯 억압적 현실의 부정적 징후인 동시에 그 상태로부터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이고, 또 그 부정적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고형렬의 허구적 상상은 부정한 현실이 주는 스트레스, 특히 우리의 근대가 충격한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브르통이 병사의 광기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본 것처럼 고형렬은 월경을 통해 해방의 가능성을 보았다. 고형렬의 허구적 상상은 우리 근대사가 전개한 파행적 상황의 정직한 증언이자, 그 상황에서도 삶을 유지하려는 처절한 생존 의지이자 윤리이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 창작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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