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하객 절반이 안 와'...징집을 피해 숨는 우크라이나 남성들

'결혼식 하객 절반이 안 와'...징집을 피해 숨는 우크라이나 남성들

BBC News 코리아 2024-06-18 11:39:05 신고

3줄요약
세르히와 타니아의 결혼식
Sakelari Photo
세르히와 타니아의 결혼식엔 절반의 하객만이 참석했다. 징병 장교들을 마주칠까 두려워한 이들이 많았다.

해변에서 열린 세르히와 타니아의 결혼식을 위협하듯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하객들과 인사하고자 긴 흰색 계단을 내려오는 이 커플에겐 더 큰 문제가 있다. 군데군데 빈 의자에서 알 수 있듯, 전체 하객의 절반이 참석하지 않았다.

불참한 가족과 친구들은 미안하다면서도 참석에 따르는 위험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징병관들에게 붙잡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군인이 죽거나, 다치거나, 너무 지쳐버리게 되면서 우크라이나 당국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에 지난달 새로 도입된 법에 따라 25~60세 모든 남성은 군 소집을 위해 자세한 신상 정보를 전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야 한다. 그리고 징병관들은 길거리를 다니며 등록을 피하는 이들을 쫓고 있다. 이에 숨어 다니는 남성들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타니아 가족 사진
Family handout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동부 최전선에서 전사한 아버지와 함께 과거 오데사에서 촬영한 타니아 가족 사진

남부 오데사의 흑해를 바라보며 새 신부 타니아(24)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왜 나가서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지 이해한다고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했다.

타니아의 아버지 또한 지난해 10월 동부 최전선인 아우디우카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이제 타니아는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다”면서 새롭게 남편이 된 세르히마저 징집되진 않을지 두렵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2년이 넘어가는 지금, 주변에 전사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긴 힘들다. 아울러 전선에선 우크라이나가 병력 규모로도 화력으로도 열세라는 암울한 소식이 들려온다고 한다.

세르히와 타니아 부부의 15년 지기 친구이자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준 막심은 수십 명에 달하는 자신의 친구와 지인도 사망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엔 경찰만 해도 100만 명이 넘는데, 왜 그들이 아닌 내가 나가서 싸워야 하냐?”고 물었다.

임신 7개월인 아내와 어린 딸이 있다는 막심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해하면서도 마치 “노상강도”와도 같은 징병관들에게 “붙잡힐까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길거리에서 남성들을 검문하는 징병관들의 모습
Thanyarat Doksone/BBC
징병관 아나톨리(오른쪽)와 올렉시는 오데사의 길거리를 다니며 새롭게 개정된 법에 따라 남성들이 병역 정보를 등록했는지 확인한다

특히 오데사에선 징병관들은 버스나 기차역에서 사람들을 끌어내 입영 센터로 곧장 데려가기로 악명 높다.

그렇기에 징병을 피하려는 이들은 이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 식당, 마트, 주말에 축구 경기가 열리는 공원도 마찬가지다.

막심은 “마치 감옥에 갇힌”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화요일 아침, 오데사의 주요 기차역엔 노련한 선원 출신 아나톨리와 조금 더 젊고 근육질의 올렉시가 징병관 12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들은 기차역 앞 광장을 돌아다니며 복무 연령인 남성들을 멈춰 세우고 이들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돼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적격한 남성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 너무 어리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면제받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아나톨리 또한 이러한 남성들은 숨어다닐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피해 도망가기도 한다. 사실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는 아나톨리는 “아니면 상당히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징병 광고
Thanyarat Doksone/BBC
우크라이나에선 새로운 법에 따라 25~60세 모든 남성들은 자신의 정보를 전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야 한다

길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입영 센터 문 앞엔 자원 입대자의 경우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다소 낙관적인 노트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줄은 없었다. 다만 어느 남성 하나가 외로이 그곳에 있었다.

자의로 온 것인지 묻자, 오늘 아침 “납치”당해 의지에 반해 끌려온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징병관들이 날 에워싸서 도망칠 수 없었다”는 이 남성은 여전히 충격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좌절했다”고 말했다.

이곳 센터에서 근무하는 징병관 블라드는 요즘엔 자원 입대자가 거의 없다고 인정했다. 한때 호출 부호 ‘호라’로 불렸던 블라드는 돈바스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탄 파편에 머리, 가슴, 다리를 맞았다.

숨어 다니며 징병을 피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멸을 감추지 못하는 블라드는 “어떻게 욕을 하지 않고 말하겠냐”며 크게 소리 질렀다.

“저는 그런 사람들은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거죠? 남자들이 없으면 적들은 우리의 집으로 향해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블라드는 최전선에서 직접 그 끔찍한 증거들을 목격했다.

블라드
Thanyarat Doksone/BBC
최전선에서 부상을 입어 현재 입영 센터에서 일하는 블라드는 자원 입대자가 거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최근 실시된 징병 제도로 인해 우크라이나 내부엔 분열이 생기고 있다. 복무 중인 남성들과 징집을 피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최전방에 가 있는 여성들과 집에 숨겨주고 있는 여성들 간에도 불편한 분열이 생겼다.

시민들의 대화에선 징집이 거의 빠지지 않으며, 종종 언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달엔 누군가 징병관의 집에 폭발물을 던지는 사건도 있었다.

한편 입대를 거부하는 남성들 사이에선 불신이 만연하다. 이들은 징병관들을 믿지 못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부 징병관이 뇌물을 받고 몇몇 남성들의 출국을 도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선으로 향하게 되리라 믿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성의 모습
Marek Polaszewski
오데사에 사는 보바는 외출 전 SNS를 확인하며 징병관들을 피해 다닌다

오데사 외곽의 어느 아파트 문 앞에 서자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함께 보바가 나타났다. 그는 7살 난 어린 딸을 마치 방패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딸과 함께 있으면 징병관들이 자신을 잡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딸 없이 절대 혼자 외출하지 않는다.

IT 공학자인 그는 지난해 출근길 버스에서 군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총을 겨누며 보바에게 버스에서 내리라고 하더니 그를 입영 센터로 끌고 갔다. 그는 서류만 챙겨서 다시 오겠다고 설득해 간신히 벗어났고, 이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보바는 “나는 군인이 아니다. 무기도 잡아본 적 없으며, 난 최전선에서 유용한 존재도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몸이 좀 아픈 곳이 있으며, 군인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는 말 등 취재진이 만난 모든 징집 기피자가 늘어놓았던 똑같은 이유를 늘어놨다.

이러한 변명 뒤, 이들의 눈에선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입대 후 몇 주 안에 총알받이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최근 정부가 신병들이 자기 스스로 어느 부대에 배치되고 어떤 역할을 맡을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자 시도하고 있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뭔가 분리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 또한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바란다. 다만 자기 자신은 연관되고 싶지 않아 한다.

보바 또한 “많은 남성들이 용감하게도 최전선에 나갔다. 이들이 자랑스럽다”면서 “이들은 정말 우크라이나 내 최고의 존재”라고 덧붙였다.

징집병 훈련 센터
Thanyarat Doksone/BBC
키이우 소재 징집병 훈련 센터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40대 후반~50대이다

한편 키이우 외곽 숲에 자리한 징집병 훈련 센터를 운영하는 헤나디 신초프는 삽을 들고 굴을 파는 병사들을 감독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따분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굴 파기는) 포탄 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는 신초프는 “이 일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혁명 정신을 지닌 애국적인 자원봉사자인 신초프는 부대 배치 전 모든 징집병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34일간의 훈련 프로그램을 감독한다. 신초프는 징집됐다고 곧장 전선에 투입되는 게 아니며, 추가 훈련도 있을 것이라 계속 강조했다.

훈련 쉬는 시간, 신초프가 훈련시키는 징집병 무리는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40대 후반~50대로, 직업은 돼지 사육사, 창고 관리자, 건축업자 등이었다. 오합지졸 같아 보이는 이들은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남은 전쟁 기간 숨어서 지내고 싶진 않다고 했다.

올렉산드르
Thanyarat Doksone/BBC
키이우의 징집병 훈련 센터에서 만난 징집병 올렉산드르는 ‘꽤 두렵다. 이 모든 게 다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중 한 명인 올렉산드르(33)는 드론 조종사가 되려고 이미 결심한 상태로, “꽤 두렵다. 모든 게 다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트램 관리자라는 올렉산드르는 숨기로 한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내 선택을 했으니, 그들도 그들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신초프는 별로 의욕적이지 않은 새 신병들의 모습에 괴로워했다. 공습 사이렌과 계속되는 정전 등 전쟁을 연상시키는 일이 매일 같이 일어남에도 오데사, 키이우와 같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시에 사는 이들로부터 전쟁의 위협이 너무 멀어졌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이 또 다른 대규모 진전을 보일 때에나 우크라이나의 병역 기피자들이 행동에 나설 것이라며 우려된다는 신초프는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다시 총을 찾고 입영 센터에 다시 줄을 설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추가 보도: 탄야랏 독손, 아나스타샤 레브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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