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 파리 올림픽: 100년 전 '빛의 도시' 파리는 올림픽 역사를 어떻게 바꿔놨나

1924 파리 올림픽: 100년 전 '빛의 도시' 파리는 올림픽 역사를 어떻게 바꿔놨나

BBC News 코리아 2024-04-27 11:55:35 신고

3줄요약
1924년 파리 올림픽 당시 경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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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 프랑스 파리에선 2024 하계 올림픽이 열릴 예정이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이후 정확히 100년만이다.

100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술 분야의 경쟁 종목 선정, 영화 ‘불의 전차’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육상선수들의 탄생까지 1924년 올림픽은 여러모로 최초이자 최후의 올림픽으로 손꼽힌다.

당시 파리에선 선수 3089명이 모여 17개 종목의 경기 126건을 치렀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올림픽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대회가 됐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선 32개 종목에 걸쳐 메달 329개가 걸려 있다.

지난 100년간 많은 종목이 제외되고, 또 그만큼 새로운 종목이 등장했으며, 선수들은 지난 기록을 깨며 계속 신기록을 세워나가고 있다. 아울러 스포츠 기술과 시설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1924 파리 올림픽은 19세기 말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킨 피에르 드 쿠베르탱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마지막으로 개최한 대회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때를 기점으로 스포츠 연맹들이 올림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표준화된 경기 규칙이 도입되고, 여러 국가의 올림픽 위원회가 자국 내 최고의 선수를 출전시키고자 실력 검증 과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2024 올림픽에선 붓을 들고 경기에 입장하는 선수도 없고, 전 세계에서 온 참가 선수만 해도 10500명에 달하며, 그 크기도 웅장하다. 그래서 1924년 올림픽과는 크게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1924년 파리 올림픽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올림픽이라는 화려한 글로벌 볼거리를 향한 길을 제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경기장에선 관중 1만9052명이 모여 개막식을 지켜봤다고 한다. 파리 북서쪽 교외에 자리한 이 경기장에선 육상, 축구, 럭비 경기가 열렸으며, 이번 올림픽을 위해 새롭게 단장됐다.

100년이 지난 지금, 2024 파리 올림픽의 개막식은 더욱더 화려하고, 재미있고, 특별한 축하 행사가 될 전망이다.

각국 선수단을 태운 배가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강을 6km 정도 이동한다. 파리의 유명 랜드마크를 지나 개막식이 열리는 장소에 멋지게 도착하게 된다.

최근 올림픽 관련 통계를 보면 전 세계에서 10억 명이 TV를 통해 이번 개막식을 지켜볼 것으로 보인다.

1924년 올림픽에선 총 62만5000명이 올림픽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올여름 올림픽 경기 시청자는 1500만 명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한 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게 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최초의 올림픽 선수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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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올림픽 당시 최초로 ‘올림픽 선수촌’이 설치됐다. 참가 선수들을 위해 경기장 근처에 여러 오두막이 지어졌다

최초의 기록들

올림픽 선수촌

우선 1924년 올림픽부터 처음으로 선수들은 전용 선수촌에서 함께 지낼 수 있게 됐다.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경기장 근처에 몇 줄로 지어진 목조 오두막이 최초의 올림픽 선수촌이었다. 수도 시설도 갖춰져 있었으며, 우체국, 신문 판매점, 환전소, 미용실, 식당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언론 생중계

1924년 올림픽부터 사상 최초로 라디오로 대회가 생중계됐다. 올림픽 취재를 공식적으로 허가 받은 기자 724명이 경기 상황을 전했다. 대부분 해외에서 온 기자였는데, 이는 올림픽의 인기와 전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에드먼드 드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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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해설가’로 불렸으나 훗날 ‘스포츠 해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드호터가 1924년 파리 올림픽의 라디오 해설을 맡았다

올림픽 경기장

1924년 하계 올림픽 주경기장이었던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는 이후 프랑스에서 열린 1938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몇 차례 개보수를 거쳐 올해 올림픽에선 하키 경기장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새로운 수영 경기장과 테니스 코트 등 1924년엔 올림픽을 위해 경기장 몇 곳이 새로 지어지기도 했다.

올여름 올림픽에서 수영 선수들의 훈련 장소로 사용될 ‘투렐 수영장’은 최초의 50m 올림픽 수영장으로, 이곳의 레인은 코르크로 된 부유물로 표시돼 있었다.

‘빛의 도시’ 파리에서 이번 올림픽을 위해 온전히 새롭게 건설되는 경기장은 단 2곳뿐이다. 대신 유명 랜드마크와 기존 경기장을 활용할 예정이다. 아울러 에펠탑 근처에 임시 비치발리볼 경기장 등 임시 구조물이 설치될 예정이다.

폐막식

1924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지금과 비슷한 폐막식 형식을 갖추게 된다. 참가국에 메달을 수여하는 한편, IOC 깃발, 1896년 근대 올림픽을 최초로 개최한 그리스의 깃발과 더불어 개최국인 프랑스와 다음 개최국인 네덜란드의 깃발이 나란히 게양되는 행사가 진행됐다.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1924년 파리 올림픽부터 처음으로 독립된 참가국으로 인정받아 출전했다.

동계 올림픽

1924년 1월 25일~2월 5일까지 프랑스 동부 샤모니에선 파리 올림픽과 연계해 몇몇 스포츠 경기가 열렸다. 그리고 이는 이후 최초의 동계 올림픽으로 인정받게 된다.

당시 16개국의 선수들이 모여 컬링, 봅슬레이, 피겨 및 스피드 스케이팅, 스키 등 16개 종목의 경기를 치렀다.

헤르마 플랭크-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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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오스트리아 출신 피겨 스케이팅 선수 헤르마 플랭크-자보

예술 부문

1924년 올림픽에선 건축과 조각, 문학, 회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부문에 대해서도 메달이 걸려 있었다.

파리에서 할리우드로: 영화 ‘불의 전차’

학생들이 만들어 준 가마를 타고 행진하는 에릭 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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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924년 하계 올림픽에서 육상 부문 금메달을 따낸 에릭 리들은 친구들이 만들어준 가마를 타고 에든버러대학 주변을 행진했다

1924년 올림픽에선 이후 아카데미 수상작으로도 선정된 1981년 작 영화 ‘불의 전차’의 영감이 되는 이야기도 탄생했다.

조금 각색된 부분도 있으나,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국의 전설적인 육상 선수인 해럴드 에이브러햄스와 에릭 리들의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여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선 에이브러햄스가 100m 결승전에서 10.6초의 기록을 세우며 먼저 금메달을 쟁취했다. 총 6명이 출전한 경기에서 1920년 금메달리스트였던 찰리 패덕 등 미국 출신의 강력한 경쟁자 4명을 제쳤다.

이후 에이브러햄스는 4x100m 계주에서도 활약하며 영국에 은메달도 안겨줬다.

해럴드 에이브러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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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올림픽에서 메달 2개를 따낸 해럴드 에이브러햄스 선수는 1년 뒤 다리가 골절되며 은퇴해야만 했다. 이후 에이브러햄스는 언론계로 전향해 BBC 라디오의 올림픽 해설자가 됐다

한편 마찬가지로 영국 육상팀 소속이었던 리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100m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예선전 경기가 일요일로 예정됐었는데, 기독교 교리상 일요일은 휴식을 취하고 예배를 드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어진 200m 결승전에서 리들이 동메달을, 에이브러햄스가 6위를 차지하자 리들이 독실한 신앙심으로 물러나지만 않았어도 100m 결승전에서도 에이브러햄스와 금메달을 놓고 경쟁을 벌였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리들에겐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400m 경기였다.

400m 결승전에서 외곽 레인에 당첨됐음에도 리들은 파리 올림픽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참고로 레인은 은퇴 이후 1945년 중국 내 일본군 수용소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생애 대부분을 선교 활동에 바쳤다.

리들은 경쟁 선수들이 바짝 추격해오는 상황에서 끝까지 선두 자릴 놓치지 않았고, 결국 47.6초라는 세계 신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가장 유명한 올림픽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두 선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불의 전차’는 음악가 반젤리스가 작곡한 주제곡이 음악상을 받는 등 작품상을 포함해 198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에릭 리들이 육상 경기에서 1등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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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400m 결승 경기에서 우승을 향해 질주하는 리들

‘플라잉 핀’

파리 올림픽의 육상 경기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건 단거리 육상 선수인 리들과 에이브러햄스뿐만이 아니다.

그 해 경기에선 어쩌면 더 놀라움을 자아낸 선수 2명이 있었다. 핀란드 출신의 이들은 중장거리 육상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온갖 메달을 휩쓸며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파보 누르미는 1500m 경기에서 3분 53초 6의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5000m 경기에서도 14분 31초 2의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왼쪽부터) V.J. 시필라, E.E. 버그, 빌레 리톨라, 파보 누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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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V.J. 시필라, E.E. 버그, 빌레 리톨라, 파보 누르미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누르미는 크로스컨트리 개인 및 단체전, 3000m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하며 금메달 총 5개를 목에 걸었다.

한편 당시 크로스컨트리 경기가 열린 날, 폭염으로 기온이 45℃까지 치솟으면서 참가 선수 38명 중 15명을 제외한 전원이 경기 중 포기했으며, 소문에 따르면 결승전을 통과한 8명도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파보 누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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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미는 1920년 벨기에 올림픽에서 10000m, 크로스컨트리 개인 및 단체 전 부문에서 각각 금메달을 차지하며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참가할 당시 이미 올림픽 금메달을 3차례 거머쥔 경험이 있는 선수였다

한편 1924년 팔에서 누르미의 위대한 성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선수는 마찬가지로 핀란드 출신의 육상 선수 빌레 리톨라다.

리톨라는 10000m 경기에서 경쟁 선수를 반 바퀴 차이로 앞지르며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는 한편 자신이 이전에 세웠던 세계 신기록도 12초 이상 앞당겼다.

게다가 리톨라는 3000m 장애물, 3000m 단체전, 크로스컨트리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땄으며, 크로스컨트리 개인전과 5000m에선 누르미에 0.2초 뒤지며 은메달 총 2개를 획득했다.

누르미와 리톨라는 1920년대 내내 중장거리 육상계를 지배하며 ‘플라잉 핀(‘하늘을 나는 핀란드인’이라는 뜻)’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빌레 리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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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톨라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총 메달 6개를 획득했는데, 이는 아직도 단일 올림픽 종목에서 개인이 획득한 최다 메달 개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성 선수들

1924년 올림픽에 출전한 3089명의 선수 중 135명이 여성이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올해 올림픽에선 남녀 선수 각각 5250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이번 대회는 참가한 선수의 성별 측면에서 온전히 평등한 최초의 올림픽이 될 전망이다.

1924년 올림픽 당시엔 여성 선수들은 다이빙, 수영, 펜싱, 테니스에만 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의 국가대표는 남성 선수 239명, 여성 선수 28명이었다.

개막식 당시 영국 여성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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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당시 영국 여성 선수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영국의 여성 선수로는 다음 2명을 꼽을 수 있다.

  • 키티 맥케인: 지금껏 올림픽에서 메달 5개 이상을 딴 영국 여성 선수는 조정 선수인 캐서린 그레인저, 사이클 선수인 로라 케니, 마장 마술 선수인 샬롯 뒤자르댕, 테니스 선수인 캐슬린 ‘키티’ 맥케인 등 4명뿐이다. 앞선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메달 3개를 획득한 맥케인은 파리 올림픽에서 은메달(복식), 동메달(단식)을 목에 걸었다. 이 두 올림픽에서 세운 업적 덕에 맥케인은 88년 뒤 그레인저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 여자 선수 중 최다 올림픽 메달 보유자였다. 아울러 맥케인은 ‘윔블던 선수권 대회’ 여자 단식 부문에서도 1924년과 1926년 2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며, 윔블던 혼성 복식 부문에서도 2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그중 2번째 우승은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 남편 레슬리 갓프리와 함께 거둔 결과였다.
  • 루시 모튼: 모튼은 평영 2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영국 여성 최초로 올림픽 수영 개인 부문에서 우승한 사례다.
루시 모튼
Getty Images
루시 모튼의 경기 장면

‘타잔’ 조니 와이즈뮬러

한편 조니 와이즈뮬러는 1924년 올림픽을 통해 미국 수영 스타로 떠올랐다.

와이즈뮬러는 성장 배경이 복잡하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으나 현재는 루마니아령인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1924년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선 미국 시민권이 필요했기에 와이즈뮬러는 실제 출생지를 속이고 펜실베이니아 출생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1984년 미국의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와이즈뮬러가 이민 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동생의 서류를 자신의 것처럼 보이도록 위조했으며, 그 결과 시스템을 속이고 미국 대표팀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후 와이즈뮬러의 아들인 조니 와이즈뮬러 주니어에 의해 이는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다.

조니 와이즈뮬러와 듀크 카하나모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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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와이즈뮬러와 듀크 카하나모쿠 선수 모두 미국 출신이다

사실 미국 대표팀이 그를 원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1922년 자유형 100m를 1분 이내로 주파한 최초의 선수가 된 와이즈뮬러는 2년 뒤인 파리 올림픽에서도 59초 안에 주파하며 또 다른 미국 수영 선수 듀크 카하나모쿠의 3연속 금메달 도전을 저지하게 된다.

와이즈뮬러는 자유형 400m, 자유형 4x200m 계영에서도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수구 대표팀으로도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미국 내셔널 챔피언십에선 52차례 우승했으며, 67차례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이후 열린 1928년 네덜란드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2개를 추가로 목에 건 와이즈뮬러는 그야말로 무패 기록을 세웠다.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수영선수로 불리는 와이즈뮬러는 이후 은퇴해 할리우드로 발길을 돌려 은막의 스타로 변신했다.

한편 미국은 올림픽 역사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1924년 올림픽에서도 메달 총 99개를 획득하며 압도적인 성과를 보여줬다.

타잔 역할을 맡은 와이즈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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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뮬러는 은퇴 후 수영장에서 할리우드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32년 영화 ‘타잔’을 시작으로 총 12편의 영화에서 타잔으로 등장했다

국가별 메달 집계

1924년 올림픽에서 미국은 금메달 45개, 은메달 27개, 동메달 27개를 획득하며 압도적인 기량을 뽐냈다. 2위는 개최국 프랑스로, 금메달 14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12개를 획득하며 자국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미국 선수들의 경기 모습
Getty Images
파리 올림픽 당시 미국 선수들의 모습

3위는 금메달 14개를 포함해 메달 총 37개를 획득한 핀란드로, 누르미와 리톨라의 공이 컸다.

당시 영국은 금메달 9개 등 총 35개를 획득하며 4위에 머물렀다.

미국의 체조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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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체조 선수팀. 존 피어슨, 프랭크 크리즈, 아돌프 징크, 프란시스 크루즈, 맥스 완드레, 루돌프 노박, 존 마이스, 찰스 크레머

1924년 올림픽에서 사용된 금메달엔 한쪽 면에 승리한 선수가 경쟁자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나도록 도와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으며, 다른 한쪽 면엔 각종 스포츠 장비와 올림픽의 문화 프로그램을 상징하는 하프가 그려져 있었다.

올해 올림픽에선 에펠탑 철 조각을 넣어 만든 메달을 선보일 예정이다. 에펠탑 보수 공사 중 나온 철 조각이 각 메달의 정중앙에 육각형 형태로 포함된다.

그 외 재미있는 사실은?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1920년과 1924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다. 아울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8년 런던 올림픽에도 출전이 금지됐다.
  • 1924년 파리 올림픽 경기 종목 중엔 건축, 조각, 문화, 회화, 음악 등 예술 경기가 메달을 건 경쟁 종목으로 포함돼 있었다. 그러다 1948년 올림픽 이후 예술 부문은 제외됐는데, 스포츠 부문에선 아마추어 선수들만 참가할 수 있으나, 예술 부문엔 전문 예술가들도 참가할 수 있어 규칙이 적절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 테니스 부문은 1924년 파리 올림픽 이후 아마추어 선수를 정의하는 방법에 대한 IOC와 테니스연맹 간 갈등으로 인해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됐다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르러서야 정식 종목으로 복귀했다.
  •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의 참가국은 29개국이었으나,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선 44개국으로 크게 증가했다.
  • 1924년 올림픽 당시 개최국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 받은 선수는 펜싱 부문의 로제 듀크레로, 금메달 3개 등 메달 총 5개를 목에 걸었다. 듀크레는 메달 총 8개로 전설과도 같은 올림픽 커리어를 쌓았다. 그 뒤 현재까지도 프랑스 선수 중 이보다 더 많은 올림픽 메달을 보유한 이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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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편집: 멜리사 쿰스

작성: 제스 앤더슨

디자인: 리 마틴

일러스트: 셀만 호스괴르

편집 보조: 존 스킬벡

이미지: 게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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