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두산·현대차 ‘임원 3관왕’, 시장을 매혹한 30년 마케팅 전문가의 저력은?

LG전자·두산·현대차 ‘임원 3관왕’, 시장을 매혹한 30년 마케팅 전문가의 저력은?

리멤버 2024-04-22 15:01:57 신고

LG전자·두산·현대차 ‘임원 3관왕’, 시장을 매혹한 30년 마케팅 전문가의 저력은?


최명화 | 現 블러썸미 대표, 前 현대자동차 상무, 前 두산 전무, 前 LG전자 상무

국내 일류 대기업들의 임원을 두루 지낸 마케팅 전문가입니다. 외국계 시장 조사 회사를 거쳐 맥킨지의 전략 컨설턴트로 마케팅 분야 경험을 쌓은 뒤, LG전자·두산·현대차 임원으로서 각각의 마케팅·브랜딩을 총괄했습니다. 현재는 마케팅 컨설팅·교육 업체 블러썸미를 창업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LG전자, 두산, 현대자동차… 대다수 직장인이 평생 한번도 오르기 힘든 대기업 임원을 연달아 세 번씩이나 지낸 굴지의 마케팅 전문가가 있습니다. LG전자에선 메가 히트작 와인폰·쿠키폰 탄생에 기여했고 두산에선 ‘사람이 미래다’ 캠페인을 주도, 두산을 당대 대학생들의 워너비 기업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현대차에선 제네시스를 독립된 브랜드로 재탄생시킨 주역 중 한 분이기도 하죠. 오늘 프롤로그 주인공, 최명화님의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최명화님도 타고난 독종이었습니다. 남들은 2~3년 안에 나가떨어지는 악명 높은 직장에서도 10년 가까이 살아남았고, 주 80시간 근무를 예삿일로 치부할 만큼 엄청난 워커홀릭이죠. 스스로 “일의 양은 겁내지 않는 사람”이라고도 자평하는 그야말로 본투비 악바리입니다.

 

“남의 인정만 갈구하는 아마추어 독종으로 남았다면 지금의 최명화도 없었을 거예요. 남이 뭐라 하든, 환경이 어떻든 자기 일과 실력에만 집중하는 것, 그게 프로 독종이자 오늘까지 절 살아남게 한 힘입니다.”

 

과연 타인의 인정과 시선에만 휘둘리던 그저그런 ‘아마추어’ 독종을 일의 본질에만 주력하는 ‘프로’ 독종으로 탈바꿈시킨 깨달음과 저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리멤버가 직접 만나 최명화님의 생생한 커리어 여정과 함께 자세히 담아봤습니다!

서울 삼성동 블러썸미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명화님/리멤버

Chapter. 1
작가를 꿈꾸던 문학도, 마케팅 박사가 되다?!

의외로 문학도셨어요.

어릴 때부터 소설을 끼고 살았어요. 스토리의 흡입력이나 구성의 탄탄함 때문에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등장인물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나 치열한 심리 묘사를 들여다보는 게 더 좋았죠. 돌이켜보면 소설 자체보단 사람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교실에서도 ‘저 친구는 왜 저럴까?’ ‘선생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늘 혼자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을 즐겼거든요. 그땐 이걸 미처 모르고 제가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가실 땐 과를 바꾸신 건가요?

막상 대학에 가보니 진성 문학도들은 따로 있더라고요. 맘껏 글을 읽고 쓰는 작가로 살고 싶었는데 어림도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무하게 꿈을 내려놓고 나니 그 순간부턴 조바심이 들더라고요. 순수 문학만 전공해선 제 경쟁력이 너무 약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실용 학문인 경영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됐습니다.

세부 전공으로 마케팅을 배운 것도 별뜻이 있던 게 아니에요. 숫자는 딱 질색이라 재무랑 회계는 쳐다도 안 봤고, 나머지 이것저것 적성에 안 맞는 것들까지 빼니 달랑 마케팅 하나 남더라고요. (웃음) 그랬던 마케팅이 제 필생의 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만큼 적성엔 잘 맞으셨나 봐요.

아닙니다. 대부분 대학에서부터 경영학을 배우고 왔더라고요. 초반엔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 친구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근심하며 열등감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반전이 일어났어요. 시험이 끝나고 첫 마케팅 전략 강의 시간이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깜짝 놀라 쳐다봤는데 웬걸, “교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경이로운 답안지를 봤다”면서 절 극찬해주시는 거예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기업의 신규 비즈니스 진출 전략을 분석하는 문제였어요. 대다수가 전형적인 경영학의 셈법으로 답을 달았는데, 저는 각각의 경제 주체에 이입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답안을 썼습니다. 사람과 그들의 서사에 집중하는, 어찌 보면 정말 문학도다운 발상이었죠. 교수님도 맨날 똑같은 답안지만 보다가 얼마나 신선했겠어요. 덕분에 열등감을 자신감으로 뒤바꿨습니다. 두고두고 되뇌일 깨달음도 얻었고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흠이 엣지가 될 수도 있다!’ 마케팅도 사실 누가 프레임을 잘 짜느냐의 싸움이거든요.

취업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박사 논문을 쓰면서 데이터의 파워에 눈을 뜨게 됐어요. 특히 신념·가치처럼 대단히 추상적인 영역에서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고, 여기서 얼마든 객관적이면서도 유의미한 시장 인사이트를 뽑아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죠. 아울러 이 과정이 제게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시장 조사 회사에서 실전 경험을 쌓으며 이 분야 전문성을 길러 보고 싶었어요.

실제 회사 업무는 기대대로였습니다. 다양한 기업의 의뢰를 받아 각국 소비자를 조사하고 그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일이었죠. 온갖 산업과 국가를 넘나들며 시장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해내는 게 무척 즐거웠습니다. 주 80시간씩 일했지만 그땐 힘든 줄도 모르고 그저 신나서 일에 몰두했네요. 덕분에 이때부터 일의 양은 겁내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서울 삼성동 블러썸미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명화님/리멤버

Chapter. 2
악명 높은 맥킨지서 8년을 살아남게 한 깨달음?

 

“남에게 날 증명해야 한다는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눈앞의 내 과제와 실력에만 온전히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어요.”

 

맥킨지로 왜 이직하셨던 건가요?

어느 순간 일이 성에 차지 않았어요. 시장 조사는 흥미로웠지만 그 해석에서만 끝나는 게 아쉬웠죠. 그 이후의 마케팅 전략까지 세우는 일을 해 보고 싶어졌어요. 때마침 헤드헌터한테 제안이 와 바로 지원해 입사했습니다.

굉장히 터프한 직장으로 알려져 있어요. 실제로 가 보니 어떠셨나요?

일단 기대대로 다양한 전략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국내 최초 프라이빗 뱅킹인 KB GOLD&WISE의 네이밍 작업, 당시로선 센세이셔널했던 LG텔레콤(현 LG U+)의 맞춤형 요금제 마케팅 등을 주도하며 크고작은 실전 경험을 쌓았죠. 하지만 이건 맥킨지가 8년간 제게 선사한 보물 같은 경험들 중 아주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더 큰 보물은 무엇이었나요?

입사 초반 무렵이었어요. 언제나처럼 저는 잘해낼 거란 확신으로 가득했어요. 저만 잘났다고 믿는 오만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할 준비가 돼 있었거든요. 늘 그래 왔듯 독종처럼 죽어라 하면 못 이룰 게 없을 거라 믿었죠.

그런데 여기선 처음으로 한계에 맞닥뜨렸어요. 생각지도 못한 영어부터 발목을 붙잡더라고요. 동료들은 네이티브 수준인데 저만 브로큰 잉글리시였거든요. 모든 회의가 영어로 진행됐는데 자신이 없어 늘 입 한번 뻥긋 못했죠. 나중엔 어떻게든 한마디 해 보려 해도 말할 거리조차 안 떠오르더라고요. 점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원래의 저답게 좌절치 않으려 했어요. “별 거 아냐. 아이 캔 두 잇!”을 연달아 되뇌며 버텼습니다. 동시에 저를 더더욱 몰아붙였어요. 매일 몸이 부서져라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근무 중 넋이 나간 채 종이에 무언가 끄적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됐어요.

뭐라고 적고 있었나요?

딱 이 두 문장이었어요. ‘명화야 괜찮아. 잘려도 돼.’ 깜짝 놀랐습니다. 여태껏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거든요. 물론 6개월마다 사람을 내보내던 회사였으니 현실적인 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잘리다뇨, 어떻게 들어온 회사였는데! 왜 그런 말을 썼는지 처음엔 도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그랬나 싶어 일단 집에 왔어요. 한참을 멍하니 곱씹어 봤죠.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속으로 이런 독백을 내뱉고 있더라고요. ‘뭐든 하면 된다고 믿었지? 그랬던 독종 최명화가 난생처음 속수무책이구나. 딱해라. 그런데, 왜 자꾸만 괜찮은 척을 하니? 남들한테 인정 못 받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게 그렇게 두려워?’ 그제서야 불쑥 튀어 나왔던 그 글귀가 이해됐습니다. 곧바로 저 스스로한테 이렇게 말해줬어요. “괜찮아 명화야. 잘려도 돼.”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전엔 상상도 못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변화들이었나요?

하나는 회의에 적극 참여하게 됐다는 거예요. 어차피 6개월 후면 안 볼 사람들인데 굳이 눈치볼 필요 없잖아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막 끼어들었어요.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보고서를 달달 외웠다는 거예요.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일 텐데 나갈 땐 메일 한 줄 못 들고 나가니 아깝잖아요. 머리에라도 열심히 주워 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둘씩 궁금한 점들이 보이더라고요. ‘이 전략은 어떻게 나온 거지?’ ‘미국에선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 그럴 땐 주저 없이 본사에까지 전화해 싹 물어봤어요.

그 결과,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회의 시간에 점점 더 말이 많아졌어요. 보고서를 독파해 내는 만큼 콘텐츠가 쌓였던 거죠. 갈수록 제 말에 힘이 실렸고 회의에서의 지분도 늘었습니다. 종국엔 회사에서의 제 위상까지 크게 올라갔어요.

오롯이 제 안으로만 시선을 집중한 게 주효했습니다. 남에게 날 증명해야 한다는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니, 눈앞의 내 과제와 실력에만 온전히 에너지를 모을 수 있던 거예요. 바로 이 변화가 오늘날까지 저를 건강히 성장케 한, 맥킨지가 선사한 큰 보물이었습니다. 덕분에 끝까지 잘리는 일도 없었습니다. (웃음)

서울 삼성동 블러썸미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명화님/리멤버

Chapter. 3
LG전자서 생애 첫 임원 등극! 마케팅의 승리로 시장을 재패하다

LG전자 합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LG텔레콤 프로젝트 때 인연을 맺은 대표님이 당시 LG전자 부회장으로 가셨어요. 그러면서 제게도 오퍼가 와 자연스레 합류했습니다. 컨설턴트는 이직 때 신뢰를 쌓은 클라이언트를 따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기업 안에서 마케팅을 A-Z까지 온전히 총괄하고픈 욕심도 있었고요. 특히 LG전자는 일반 소비자 중심의 가전이 강점인 만큼 마케터로서 제가 더 기여할 게 많다고 봤습니다.

LG전자 최연소 여성 임원이자 최초의 외부 영입 여성 임원이셨습니다. 별다른 부담은 없으셨나요?

LG는 인화를 중시하는 회사라 어려움은 없었어요. 업무에만 주력 가능한 환경이었죠. 당시 LG전자는 부회장님 주도로 인사이트 마케팅팀이란 게 만들어져 있었어요. 숨은 고객 니즈를 찾고 마케팅과 제품 개발에 접목해보자는 시도였죠. 이 팀을 이끌어 성과를 내는 게 제 미션이었습니다. 여기에만 집중했어요.

와인폰은 “철저한 마케팅의 승리”란 평을 받습니다.

기존에도 중장년층을 겨냥한 피처폰 시리즈가 있었지만 실패를 거듭했어요. 이름부터가 실버폰이었거든요. 어떤 중장년이 자신을 실버로 규정하겠어요. 마케팅적 이해가 부족했던 겁니다.

별다른 변화 없이 마케팅 포인트만 살짝 바꿨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드는 사람들이 쓰는 폰’을 연상시키는 실버폰 대신, ‘와인처럼 성숙한 세대를 위한 폰’이란 의미의 와인폰을 새 이름을 짓고 이를 적극 어필했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화면이나 자판 크기를 키우는 등 작은 변화만 있을 뿐 실버폰과 스펙·성능 차이는 거의 없었는데 매출이 급상승했으니까요. 온전한 마케팅의 승리였다고 봐요.

2007년 LG전자에서 중장년층을 겨냥해 출시한 와인폰/LG전자

쿠키폰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휴대폰도 다른 전자 제품처럼 현지 맞춤화가 절대적이에요. 생산비는 적게 올리면서 누가 커스터마이징을 더 잘하느냐의 싸움이죠. 무작정 중국으로 가 현지인들을 관찰했습니다. 그랬더니 두드러지는 특징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바로 휴대폰을 남들에게 자랑하듯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았단 거예요. 당시만 해도 중국은 신흥 휴대폰 시장이었거든요. 때문에 휴대폰이 과시의 도구로도 쓰였던 거죠.

마케팅 포인트를 이 니즈에만 집중했습니다. 개발 부서와 논의해 최대한 첨단스러운 디자인을 만들기로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풀 터치 스크린이었습니다. 가뜩이나 휴대폰이 귀한데 액정이 완전 터치로 작동한다? 얼마나 자랑하기 좋았겠어요. 대신 불필요한 기능은 최소화해 가격은 쌌고요.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역시나 마케팅의 승리였던 거죠.

일련의 성공을 거치며 마케팅에 대단한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흔히 제품이나 영업을 마케팅보다 우선하죠? 그러나 비즈니스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일이에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고객의 진짜 마음을 헤아리고 그걸 풀 실마리를 찾는 게 마케팅이잖아요.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릅니다. 이게 피부로 와닿은 시간들이었네요.

LG전자 상무 시절 최명화님(왼)과 당시 그가 탄생시킨 메가 히트작 쿠키폰/LG전자

Chapter. 4
B2B의 중심에서 브랜드 마케팅을 이끌다! 두산에서 맛본 성공과 한계?

두산엔 어떻게 합류하게 되셨나요?

먼저 제안이 왔어요. 두산도 맥킨지 시절 고객사라 원래부터 잘 아는 회사였거든요. 그런데 제안 자체가 색달라 더 관심이 갔습니다. 기존까지 저는 상품 하나하나의 마케팅에 주력해 왔잖아요. 그런데 두산에선 그룹사 전체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그걸 대중에 세일즈하는, 어찌 보면 스케일이 가장 큰 마케팅 미션을 줬던 거죠. 가슴이 쿵쾅 뛰더라고요. 고민 없이 바로 수락했습니다.

‘사람이 미래다’ 캠페인은 7년이나 이어진 두산의 대표 브랜딩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대중은 물론 업계에서도 센세이셔널하단 평가를 많이 받았습니다. 일단 접근 방식 자체가 신선했잖아요. 제품 홍보는 일절 없이 그저 기업 철학만 내세운 캠페인은 그때까지 드물었습니다. 두산이 거의 최초였죠. 사실 내용 자체는 별다른 크리에이티브로 나온 게 아닙니다. 핵심 카피는 박용만 전 회장님이 항상 하던 말씀이었고, 그 철학을 저희 마케팅 조직과 광고 대행사가 좋은 그릇에 담아 보여줬을 뿐이에요.

저 스스로 가장 기쁜 건 마케팅의 진가가 또 한 번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이었어요. 두산은 철강이나 중장비를 파는 B2B 회사잖아요. 때문에 두산의 기업 정신과 가치를 대중적으로 소구하기엔 애로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 캠페인이 대박을 치면서 두산의 철학이 일순간에 온국민에게 퍼지고 각인됐잖아요. 마케터로서 쾌감이 대단했습니다.

이른 시기에 두산을 떠나셨어요.

두산이란 기업은 객관적으로 참 좋은 직장이었어요. 철학, 비전, 문화, 리더십 등 모든 게 훌륭하고 모범적이었죠. 하지만 제겐 회사를 평가할 때 더 중요한 기준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이 회사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느냐’였어요. 아무리 좋은 회사라도 제가 별다른 기여를 못하는 곳이면 저한텐 좋은 직장이 아니었던 거예요.

두산에선 제가 기여할 파이가 상대적으로 작다고 느꼈습니다. 브랜딩 캠페인 이외에는 제가 크게 나서서 활약할 공간이 없더라고요. B2B 기업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대중을 상대하는 마케팅이란 영역에선 제약이 컸던 거죠. 연봉은 많이 받는데 과연 양껏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 괴로웠습니다. 주 80시간을 넘게 일해도 재미만 있으면 끄떡없던 저였는데, 처음으로 일을 하면서 힘이 쭉쭉 빠지더라고요. 그런 제 모습이 회사에서도 드러났던 것 같아요. 결국 제 쓸모가 좀 더 많은 곳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두산 ‘사람이 미래다’ 캠페인의 지면 광고/두산

Chapter. 5
대기업 임원 3관왕,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를 발굴하다

 

“진짜 마케팅은 고객이 바라는, 아니 고객의 영혼까지 감동시킬 제품의 상을 만들어 전하는 일이에요.”

 

현대차로 가셨던 이유는요?

자동차야말로 마케팅의 꽃인 상품이에요. 차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자아의 확장과도 같습니다. 가령 음료나 과자는 단돈 1000원, 아니 500원만 비싸지거나 싸져도 반응이 아주 민감하게 달라져요. 그날그날 소비하고 넘기는 물건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차는 다르죠. 본인에게 1000만원이 있다고 해서 꼭 그 가격대 차만 사진 않습니다. 오히려 돈을 더 모아서라도 영혼을 울리는 차를 사고 싶어 하죠. 브랜드와 디자인에서부터 핸들·기어 모양, 하다 못해 엔진 소리까지 따져가면서요. 마침내 차를 구매할 땐 “이 차는 내 드림카야. 엔진 소리가 날 미치게 하거든!” 같은 감탄까지 나오는 이유죠.

그래서 마케터의 역할도 정말 극적으로 중요해지는 거예요. 고객이 바라는, 아니 고객의 영혼까지 감동시킬 제품의 상을 만들어 전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무리 좋은 성능과 디자인도 그 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외면받는 게 바로 차거든요. 저도 언젠간 한번쯤 자동차 마케팅에 도전해보고 싶어 오랫동안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마침 자리가 나서 가게 됐어요. 이직한 곳들 중 유일하게 제가 먼저 지원해 들어간 회사였죠.

합류 이후로 현대차 광고가 많이 부드러워졌단 평이 나왔죠. 2013년 쏘나타 광고가 그 대표 사례인데요. 비 오는 날의 정취만 강조할 뿐 이례적으로 차체는 잘 드러나지 않아 화제였습니다. 그해 광고계 최고 권위상인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상을 받기도 했죠.

광고에 감성적 터치를 넣은 건 그저 감에 의한 판단이 아니었어요. 현대차란 다소 마초적 조직에서 그런 변화가 가능했던 건 ‘차 구매의 50% 이상은 여성이 결정한다’는 확고한 데이터에 주목했기 때문이에요. 기존 차 마케팅은 운전자만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죠. 하지만 따져보면 자동차의 고객이 어디 운전자뿐인가요? 그 차를 타고 내리는 모든 사람, 즉 그 운전자의 배우자도 고객인 거예요.

때문에 운전자뿐 아니라 탑승자 모두의 워너비 페르소나에 걸맞은 제품 이미지를 구축하는 게 아주 결정적 마케팅 포인트가 되는 것이죠. 본사에서 이같은 대전략을 세우고, 담당 사업부와 긴밀하게 소통했던 게 빛을 발했어요. 덕분에 선루프에 떨어지는 빗소리, 고요한 새벽 드라이브 길 등 차와 함께 하는 경험을 강조한 광고가 탄생했죠. 구체적 성능·스펙은 잘 모르는 동승자까지도 그 차체의 감성을 물씬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상을 받은 2013년 쏘나타 광고/현대자동차 유튜브 캡처

고급차 브랜드 출시를 놓고 내부에서도 고민이 많았다면서요.

글로벌 차량 제조사 중 거의 유일하게 현대차만 단일 브랜드를 고집했어요. 그러다 보니 판매차의 가격 폭이 너무 넓어 뾰족한 브랜드 마케팅에 어려움이 컸죠. 때문에 고급차 브랜드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나왔는데 논의는 매번 지지부진했습니다. “새 브랜드를 만들자” “아예 다른 브랜드를 사버리자” 등 여러 옵션이 거론됐는데 어느 것 하나 힘을 받지 못했죠.

그런데 그 무렵, 저희 마케팅 전략실에서 굉장히 주목한 차량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제네시스였어요. 고급차 브랜드 출시의 가장 큰 목적은 해외 진출이잖아요. 제네시스는 이미 해외에서 각광받는 상품이었어요. 국내 반응도 아주 좋았고요. 제네시스란 포장지에 엣지만 살짝 더 가미하면 독립 브랜드로서도 손색이 없을 거라 봤습니다. 여기에 하나둘 공감대가 모여 별도 브랜드 론칭이 추진됐던 거예요. 이젠 현대차를 떠났지만 제네시스는 볼 때마다 자식 보듯 뿌듯합니다. (웃음)

현대차 상무 시절 최명화님(왼)과 최명화님 주도 하에 제네시스가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출범한 이후 처음 출시된 G90 모델/현대차

Chapter. 6
30년 마케팅 전문가의 다음 마케팅 미션은 ‘포스트 최명화’ 만들기?

 

“프로란 모두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더 나아가 누구나 같이 일하자고 조르고 매달리는 사람”

 

창업에 나선 계기가 무엇인가요?

월급쟁이는 그쯤 했으면 됐다고 봤어요. 20여년간 너무나 만족스러웠고, 너무나 감사했고, 하고픈 건 다 해봤거든요. 정말 원이 없었죠. 사실 현대차를 떠날 무렵 오퍼도 여럿 받았는데 다 거절했습니다. 그다지 새롭고 흥미로운 일도 없을 것 같고, 제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충분히 더 잘해낼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일을 멈추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는 40대보다 50대에 더 빛나고, 50대보다 60대에 더 많은 이가 찾으며, 60대보다 70대에 더 행복한 인간이길 바라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이제부턴 최명화가 아니면 안되는, 대체 불가한 일을 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게 바로 창업이었어요. 제겐 나름 최연소·최초 타이틀이 많이 붙었잖아요? 겉보기엔 화려하겠지만 무언가의 1호로 산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후배들은 그 길을 더 영리하게 통과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고, 제가 그 적임이라고 자신했어요.

창업자로서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없을 리가요. (웃음) 무엇보다 일하는 동력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는 게 가장 힘든 점이더라고요. 직장에 다닐 땐 연봉이 오르내리거나 성과 압박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동기 부여를 받게 되잖아요. 그런데 창업은 오롯이 스스로 그 동기를 끌어내야 해요. 그게 참 힘들었고, 여전히 힘듭니다. 업황이 안 좋을 땐 훨씬요.

그래도 8년 넘게 잘 이끌고 계시네요.

‘사람이 미래’더라고요. (웃음) 주변을 둘러보니 저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었어요. 뜻을 모아 창업에 동참해 준 후배들부터 함께 하는 직원들까지 늘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여전히 제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어요. 가끔 동력을 잃게 되더라도 이들이 채워주는 에너지로 숱한 고비를 넘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후배 직장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잘 해내고 인정받고 싶어 지독하게 일에 매달리는 후배들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꼭 과거의 저처럼요. 물론 그게 엄청난 성장 동력이 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시선이 오롯이 바깥을 향하고만 있다면 결코 롱런할 수 없을 거예요. 그 욕심의 방향을 돌려 자신이 진정 이루고 싶은 일에 집중해보세요. 진짜 건강한 성장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겁니다.

2023년 한국경제와 INF컨설팅이 공동 주최한 한 포럼에서 마케팅 전략 강연 중인 최명화님/블러썸미

최명화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모두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더 나아가 누구나 같이 일하자고 조르고 매달리는 사람이에요. 사실 함께 일하고픈 사람은 많아요. 성격이 착하다거나 입담이 뛰어나 재밌는 사람도 함께 일하고 싶죠. 하지만 같이 일하자고 조르고 매달릴 만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좁고 명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바로 자기가 맡은 일은 무슨 수를 써서든 완벽히 해낸다는 점이에요. 소위 말해서 ‘어떻게든 일을 되게끔 만드는 사람’이죠.

이런 프로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끈덕지게 눈앞의 과제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뭐라 하든, 환경이 어떻든 자신의 과제와 그걸 이룰 자기 실력에만 에너지를 쏟을 수 있어야 하죠. 반면 남의 인정을 갈구해 노력하는 거라면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그건 독종이라도 결국 아마추어에 불과합니다. 거기 머물렀다면 지금의 최명화도 없었을 거예요. 남이 뭐라 하든, 환경이 어떻든 자기 일과 실력에만 집중하는 것, 그게 프로 독종이자 오늘까지 절 살아남게 한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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