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열리는 로렌스 위너 첫 대규모 회고전

한국에서 열리는 로렌스 위너 첫 대규모 회고전

바자 2023-10-04 00:30:00 신고

 
《LAWRENCE WEINER: UNDER THE SUN》 전시장 전경.
《LAWRENCE WEINER: UNDER THE SUN》 전시장 전경.
추상회화로 예술가의 길에 접어든 스무 살의 로렌스 위너가 죽기 전까지 언어를 도구로 택한 이유는 간명하다. 언어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그는 예술이 사람들의 삶과 괴리되지 않고 삶에 쓸모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적이기도, 문학적이기도, 지극히 건조하게 서술되어있기도 한 단어로 이루어진 ‘언어 조각’은 그가 나고 자란 뉴욕의 담벼락, 이탈리아 라디스폴리 해변 상공, 옥스퍼드셔의 궁전을 막론하고 어떤 장소에서든 관람객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삶과 이 텍스트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냐고. 특정 시대와 문화권, 주제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보편적 단어들은 관람객 스스로 작품과 사적 관계를 맺게 만듦으로써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을 오롯이 개별적인 경험으로 변모시킨다.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어젠다가 될 수도, 누군가에겐 명상적 체험이나 삶의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체현이 되기도 하는 것이 위너의 작품이 지닌 고유한 힘이다.
지금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하 APMA) 전시장 안에 40여 점의 언어 조각과 에디션, 모션 드로잉 등 다양한 작품이 해처럼 떠오르거나 만화경처럼 빙빙 돌아가는 듯 튀어오르고 있다. 55년간 그의 작업 세계를 곁에서 지켜온 로렌스위너재단의 이사이자 아내 앨리스 위너는 APMA 큐레토리얼 팀과 함께 2021년 작가의 작고 이후 첫 대규모 회고전 «LAWRENCE WEINER: UNDER THE SUN»을 기획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위너의 작품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건, 우연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 덧붙이며.
 
1970년대 포토부스에서 30대의 로렌스 위너와 앨리스 위너.
1970년대 포토부스에서 30대의 로렌스 위너와 앨리스 위너.
가장 보편적으로 해석되는 작품 중 하나인 〈UNDER THE SUN〉은 이 세계가 태양처럼 물질, 문화, 대상을 넘어 모두와 관계 맺는다는 메시지를 말하지만, 우리는 매일 이 작품에서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날 당신이 어떤 기분으로 눈을 떴는지에 따라 작품은 다르게 읽히게 된다.
 
Q «LAWRENCE WEINER: UNDER THE SUN»은 작가의 작고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이자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이다. APMA가 〈UNDER THE SUN〉을 소장하게 된 계기로 고미술 소장품과 함께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어떤 점에 유의하며 전시를 구성했나? 

A 이제는 과거형이 된 로렌스의 첫 전시이기 때문에 무한하기도 하고 유한해지기도 한 그의 유산을 다루는 게 내게도 새로운 과제였다. 한국의 고미술품과 로렌스의 작품들이 얼핏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큐레이터와 함께 마치 맞춤 양복을 짓는 것처럼 관계를 깊이 고려해 배치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줄지어 고미술품 6점이 배치된 5, 6 전시장의 경우, 로렌스가 강조한 동시적 현실을 다루는 공간으로 상정했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현재와 관람객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속성이 고미술품이 지닌 시간성을 통해 어떻게 지금의 현실을 만들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Q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시선에 대해 언급한 작품들이 모여있다가(〈AS FAR AS THE EYE CAN SEE〉 〈REMOVED FROM VIEW〉 등) 고정된 합판 한 장과 함께 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경계에 대해서 전하며 일종의 시퀀스처럼 작품들이 배치해있다. 관람객이 특히 주목하길 바라는 구성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전시를 준비하며 한국의 전통에 대해 심도 깊은 스터디를 했는데, 한국 건축의 특징 가운데 특히 문의 모양이 미국인인 내겐 낯설게 보였다. 건물의 통로 입구마다 시각적인 기호들을 배치한 점을 눈여겨보면 좋겠다. 또 달항아리의 불완전한 완벽함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이 무척 동시대적인 작품이라 느꼈다. 언젠간 꼭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기에 〈UNDER THE SUN〉 작품과 함께 배치된 달항아리를 보며 ‘햇빛 아래에 놓인 달’ 같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달항아리는 온도, 습도 등 통제되지 않는 요소들이 서로 다른 시간성을 담고 있고 철이나 유약 같은 서로 다른 물질을 포괄하는데, 그런 요소 또한 로렌스의 작품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 사대부 문화에서는 달항아리 뒤에 두루마리나 족자 같은 그림을 함께 놓는다고 들었는데 언어 조각 작품들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WITHIN A REALM OF DISTANCE〉, Woodstock, Fragment, Blenheim Art Foundation, 2015. Photo: Hugo Glendinning
〈WITHIN A REALM OF DISTANCE〉, Woodstock, Fragment, Blenheim Art Foundation, 2015. Photo: Hugo Glendinning
Q 전시장 입구에 1969년 발표한 ‘의도의 진술(Declaration of Intent)’을 배치해 개념미술사에 영향을 끼친 그의 예술적 시작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1.예술가는 작품을 고안할 수 있다 / 2. 작품은 제작될 수 있다 / 3.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 4. 각 항은 예술가의 의도와 동등하고 일치하며 조건에 대한 결정은 수용 당시 수용자에게 달려 있다” 1968년 큐레이터 세스 시겔롭이 기획한 전시에 설치한 작품이 대학생들에 의해 파손된 다음, 이 선언문을 썼다. 

A 로렌스의 전시에서 이 선언문을 공개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선언문은 작품으로 배치된 게 아니라 전시 시작 전 전시 설명문, 즉 큐레토리얼 스테이트먼트 안에 담겨 있다. 이는 회고전을 위한 상당히 의도적인 선택인데, 그 이유는 ‘의도의 진술’이 위너가 처음 언어를 활용한 작업을 선보인 전시를 통해 쓰였기 때문이다. 이후 도록에도 실린 바 있다. 선언문은 예술가의 의도가 특정한 장소, 형태, 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구현되며, ‘수용자’가 실제 제작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앞으로 작품을 감상하게 될 당신들, 수용자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뜻으로 공개하고 싶었다. 마치 중요한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Q 그와 이 선언문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나? 

A 1960년대는 마셜 맥루언이 지구촌에 대해 얘기하고, 문화 인류학자들은 원주민들이 컨테이너박스를 신의 존재라 믿었던 ‘카고 컬트’의 개념에 대해 논의하던 시대였다. 로렌스를 포함한 뉴욕의 작가들은 이런 시대에 물질적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예술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열띤 고민을 해왔다. 처음에는 회화 작업을 하다가 점차 캔버스에 모양을 내게 되고, 그 다음은 캔버스 가장 자리나 옆면만 색칠하다가, 벽의 표면으로 언어 작업을 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또 흥미로운 점은, 1960년대는 공산품 같은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을 때 항상 일종의 보증서를 일상적으로 지참하던 시대였다. 선언문의 형식을 통해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 예술의 언저리로 포섭되는 것을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

Q 전시장에는 총 7개의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어있다. 위너는 헬베티카 같은 폰트는 변질되었다고 말하며 폰트 선정에도 기준이 확고했는데, 다른 국가의 언어로 번역할 때 어떤 주의를 기울이나? 

A 주로 가장 최근 전시에서 사용한 폰트를 기준으로 삼는다. 전시장에는 1969년 작품부터 2020년 작품까지 공존해있는데, 특정 시기에 사용한 적절한 폰트를 배치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언어 작업 초창기 15년까지는 ‘프랭클린 고딕 엑스트라 컨덴스’ 같은 폰트를 즐겨 사용했기에 그 부분을 살리려고도 했다. 무엇보다 ‘의도의 진술’의 의미가 곡해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한국어에서는 ‘the’라는 정관사가 쓰이지 않기도 하고, 원문에는 ‘that’이라는 대명사가 계속 쓰이는데, 한국어로 번역되면 더 많은 공간이 남게 되어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한국인 직원이 있어서 큰 도움을 받았다.

 
전시장에서는 한국 고미술품과 국문 병기로 설치한 7점의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전시장에서는 한국 고미술품과 국문 병기로 설치한 7점의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Q 위너는 자신의 작품을 장소특정적이라 여기지 않았지만, 어디에 있든 새로운 맥락을 갖는다는 점에서 관람객에게는 여느 작품보다 장소특정적 예술로 와닿는다. 특히 2015년 옥스퍼드셔 블레넘궁의 지붕과 내부에 배치된 조각들은 역사를 넘나들며 뉴욕의 미니멀리즘과 영국 바로크 양식이 한 공간 안에서 교차하는 대표적인 예다. 

A 블레넘궁은 미국 작가의 작품이 놓이기에 너무나 중요한 장소라 생각한다. 단순히 잘 보존된 궁전이 아니라 그 공간의 역사를 보면, 남성이 아닌 여성에 의해 소유가 되기도 한 점, 마을의 교회 같은 역할을 한 특성 등이 흥미로웠고, 그런 특성이 각각의 작품 배치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또 그 건물의 방 중 하나는 윈스턴 처칠이 브루클린 출신 어머니의 산고 끝에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웃음)

Q 언어 조각은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듯한 그래픽적 구성 또한 중요한 특징이다. 피에트 몬드리안 같은 아방가르드 아티스트에도 영향받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A 초기 작업의 구성들은 스튜디오의 환경적 요소들이 많이 반영돼 있다. 벽의 칠이 벗겨지거나 무엇이든 갑자기 쾅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곳이었고 그래서 문턱이나 경계에 대한 작업을 당시에 많이 했다. 전시를 위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는 좀 더 스타일적인 측면에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살색과 가까운 ‘프렌치 핑크’색으로 레터링 작업을 했고, 네덜란드에 정착하면서부터는 더치 그래픽 디자인에 큰 영향을 받아 원색을 과감히 사용하는 시도가 늘어났다. 과거 유랑하던 예술가들이 마을과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빵이나 위스키를 받았던 것처럼 로렌스 역시 미국을 떠난 이후부터 줄곧 비슷한 태도를 취했달까.

Q 위너는 한때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하며 떠돌았고, 북극에 머물렀으며 작고하기 몇 해 전까지 자메이카로 휴가를 떠나기도 할 만큼 노매드적인 삶을 살았다. 암스테르담의 보트와 뉴욕 스튜디오를 오가는 생활을 반세기 가까이 지속하기도 했다. 환경을 바꾸는 삶이 그의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 

A 로렌스는 일평생 모험가였는데, 14살쯤 처음 집을 나가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16살쯤엔 극지대에서 에스키모 여자친구를 사귀기도 했다.(웃음) 이후 멕시코에서 윌리엄 버로스 같은 비트 세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고. 이 모든 것들은 언어 작업을 하기 전 이전의 경험인데, 그때 국가라는 것이 거대한 펠트천 같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딸 키얼스틴이 태어난 25살쯤 언어 작업에 매진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폭이 5m밖에 되지 않는, 1910년 만들어진 암스테르담의 오래된 하우스 보트에 살았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곳에서 추위에 떨며 아기를 돌봤던 기억이 난다.(웃음) 하우스 보트에서 생활하며, 우리는 공동체적인 삶에 대해 배웠다. 가족이 아니어도, 보트 거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삶을 살았다.

Q 출판과 포스터에 남다른 애착을 쏟았고 세라믹 플레이트나 타일에 새긴 언어 조각 등 다양한 물질에 관심을 두었다. 그런 그가 특별히 수집했던 사물이 있었나?

A 몇 년간 아프리카 부족이 만든 조각을 모은 적이 있지만, 물건을 그러모으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동일하게 존재하는 사물들, 예를 들면 물병의 뚜껑이나 땅에 떨어진 쇳조각, 해안가에서 닳아 빛바랜 유리조각을 모으기도 했다. ‘SLUK’이라는 무의미한 단어가 쓰인 뚜껑은 평생 그의 서랍장에 보관되어 있었다. 엇비슷해 보이는 사물들을 로렌스는 기가 막히게 하나하나 어느 도시에서 수집했는지 기억했다.

 
Q 인간으로서, 창작자로서 그에게 놀라운 점은 무척 정치적 사안에 관심이 많은 사람임에도 프로파간다적인 문구가 아니라 매번 포용적인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작품이 시간이 흘러도 특정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인상을 주는 이유라 생각한다. 

A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본래 시간을 초월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 시절 로렌스는 아시아 철학과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교리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지구상에 사람들과 사물이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보편적인 언어를 깨우쳤다고 생각한다. 처음 만난 1970년에도 우리는 디티 스즈키가 주장한 젠, 앨런 와트의 카톨릭 철학, 노자의 사상에 대해 쉴 새 없이 토론하곤 했다. 로렌스는 평생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거꾸로 되묻는 사람이었다. 대화를 할 때 누구도 배제되지 않기를 바라는 편이었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질문하고 대화하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관객들 또한 자신의 하루 안에서 어떤 질문을 발견한다면 그가 더없이 행복해할 거다. 말하자면 내일의 일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얻을 수 있기를. 이모티콘의 폭격을 받으며 일 생각만 하기보다는.(웃음)

Q 궁극적으로 당신은 로렌스의 작품에서 무엇을 발견하나? 

A 한 가지를 꼽기가 정말 어렵다. 최근에는 한 단어로만 이루어진 〈TRACES〉 연작에 매료되어 있다. 어디로, 어떤 과정을 거쳐 가야 할지를 말해주지 않고 미지의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 이끌린다. 가장 보편적으로 해석되는 작품 중 하나인 〈UNDER THE SUN〉은 이 세계가 태양처럼 물질, 문화, 대상을 넘어 모두와 관계 맺는다는 메시지를 말하지만, 우리는 매일 이 작품에서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날 당신이 어떤 기분으로 눈을 떴는지에 따라 작품은 다르게 읽히게 된다. 나 역시 그의 작품을 온전히 해석하는(것 같은) 경험을 가질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건 상당히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연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채로 보려하는지, 모르는 것을 좀 남겨두면 안 되는지 거꾸로 묻고 싶다.

 
※ «LAWRENCE WEINER: UNDER THE SUN»은 8월 31일부터 2024년 1월 28일까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다.
 
안서경은 〈바자〉피처 에디터다. 모마 웹사이트에서 로렌스 위너의 1963~1965년작 페인팅을 찾아보며 그가 지나온 시절을 하염없이 상상했다.


글/ 안서경 사진/ 오준섭(전시 전경), ⓒ 페이스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Copyright ⓒ 바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