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없다, 도널드 저드

아무 것도 없다, 도널드 저드

바자 2023-10-04 00:30:00 신고

 
Donald Judd, 〈Untitled〉, 1989, 녹색 양극산화 알루미늄과 투명 플렉시 유리, 15.2 x 68.6x61cm. photo: 안천호. copy;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copy;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Donald Judd, 〈Untitled〉, 1989, 녹색 양극산화 알루미늄과 투명 플렉시 유리, 15.2 x 68.6x61cm. photo: 안천호. copy;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copy;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저는 삶과 예술을 구분하지 않아요. 예술은 어떤 물건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하늘도 감상할 수 있지만 하늘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예술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예술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주죠. 생각을 표현한 것이 예술입니다.
 
“세상은 원자와 빈 공간뿐, 나머지는 모두 의견이다.” 기원전 460년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우주 전체의 근원은 원자와 허공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관습적으로 믿어지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저드 재단의 예술감독이자 도널드 저드의 아들 플래빈 저드가 이번 전시를 위해 기꺼이 꺼내든 이 문장은 저드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아포리즘이다. 예술에서 환영(Illusion)이라는 신을 배제하고 사물의 본질에 다가섰던 저드의 시도는 세상에서 신을 배제하고 물질의 본질에 다가서고자 했던 데모크리토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저드는 예술로서 무언가를 재현하거나 기록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술가의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할 생각도 없었다. ‘인격화된 형태, 의미있는 상징, 신중한 붓놀림(카일 차이카, 「단순한 열망」)’ 따위의 신성하고 초월적인 예술은 타파하고 구리와 스테인리스스틸, 유리 같은 산업재료를 거기에 두었을 뿐이다. 차가운 금속성, 나무상자의 빈 공간, 반짝이는 유리 표면 같은 재료의 성질을 감각하는 일은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순간순간의 경이와도 닮아있다. 그것은 정원의 흙과 별과 바위를 바라보고 은하계에 관심을 갖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1986년 도널드 저드는 텍사스 마르파 사막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얻은 깨달음을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마침내 예술의 정의가 떠올랐다. 예술은 바로 지금의 모든 것이다.” 저드 재단의 예술감독 플래빈 저드와 서신으로 나눈 대화를 통해 이 문장에 주석을 달아 본다. 
 
 도널드 저드 개인전, 전시전경, 타데우스 로팍, 서울, 2023년 9월 4일-11월 4일. Photo: artifacts. cop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copy;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도널드 저드 개인전, 전시전경, 타데우스 로팍, 서울, 2023년 9월 4일-11월 4일. Photo: artifacts. cop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copy;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Q 도널드 저드에겐 장소 감각이 매우 중요했죠. 당신 또한 그의 전시를 기획하는 데 있어서 주제나 철학적 의도를 배제하고 작품이 공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중점을 둔다고 밝혀왔습니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갤러리가 매우 길고 좁은 독특한 형태의 화이트 큐브인데요. 어려움은 없었나요? 

A 타데우스 로팍 서울의 전시장 벽들은 거의 평행합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공간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을 선택했어요. 작품을 선택하기 전에 공간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이런 경우는 언제나 약간의 모험이 강행되죠. 다행히 이번 전시에서는 아주 좋은 결과가 나왔고요. 한국에서 10년 만에 열리는 전시인 만큼, 다양한 표면과 형태를 가진 작품을 선보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Q 가장 내부에 있는 1960년작 유화 두 점(무제)은 3차원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작가는 1987년의 한 인터뷰에서 “내 작품의 근원은 회화 작업”이라 단언한 바 있다죠. 이 작업들에 대해 들려줄 히스토리가 있습니까? 이 두 점의 유화가 그가 가장 높이 평가했던 화가들인 바넷 뉴먼(Barnett Newman),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초기 작품처럼 회화라기보다는 사물의 상태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A 도널드 저드는 성공적인 페인터는 아니었고, 스스로도 이를 인정했습니다. 대부분 직사각형 형태인 평평한 표면이나 물감 등 회화가 지닌 규정들은 모두 그가 지키고 싶지 않은 표준적인 관습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 도널드 저드는 회화의 본질에 거의 반하는, 즉 거창한 철학적 혹은 역사적 신화를 참조하거나 이해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작품이 그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고군분투했습니다. 그 모습이 작품을 통해 확인되고요. 그는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원했어요. 그림은 기본적으로 캔버스와 틀을 숨기는 것인데 이 모순에 직면한 그는 다른 작업을 해야만 했죠. 바로 이때 저드의 작품은 처음에는 얕은 부조로, 그리고 점차 벽과 바닥에 놓여지는 입체작품으로 변모합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위해 회화에서 벗어나야 했던 거죠.

Q 1989년작 녹색 알루미늄 오브제(조각이라고 불리는 건 거부하셨지요)와 1985년작 채색 알루미늄 오브제만 비교해봐도 그렇습니다만 각각의 사각형 오브제가 서로 다른 높이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설정한 설치 기준일 텐데 어떤 의도인가요? 

A 각각의 작품들은 모두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되었고, 모양도 다릅니다. 그래서 각각 전시되는 높이도 다르죠. 채색된 알루미늄 작품의 경우 설치된 높이가 특히 낮은데, 이는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이 작품의 윗면까지 볼 수 있도록 함과 더불어 이것이 3차원의 입체적 작품임을 명확히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Q 목판화 20개 세트도 궁금합니다. 1991년 개인전으로 한국에 방문하고 그때 접한 한지라는 매체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으나 그후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사후에 완성되었습니다. 작가의 유지가 어떻게, 얼마나 반영되어 있습니까? 

A 아버지는 판화 제작자 로버트 아버(Robert Arber)와 긴밀히 일했어요. 그가 한국에서 가져온 한지를 사용해서 한 세트 인쇄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아카이브용 종이가 아니다 보니 판화에는 적합하지 않았죠. 그래서 이후 재단은 한지를 재현하되 아카이브용 기준에 맞는 종이를 제작하였고, 다시 로버트 아버와 협력하여 하나의 세트를 완성하였습니다.

Q 1947년 미군으로 한국에 주둔하여 엔지니어로 일했을 때 그의 나이가 고작 열여덟이었다죠. 위대한 예술가가 난생 처음 경험한 타문화라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때의 경험이 작업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 믿게 됩니다. 이번 전시의 도록에서 LA카운티뮤지엄 관장 마이클 고번(Michael Govan)은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한국 전통미술과 건축이 저드의 공간 이론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A 자세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마이클과 저 모두 그가 서울의 궁궐을 방문하고 한국 문화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목도함으로써 다양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 동의했습니다. 미국 중서부 출신의 열여덟 살 청년에게 한국은 놀라운 곳이었을 겁니다.

 
 Donald Judd, 〈Untitled〉, 1985, 채색 알루미늄, 30x150x30cm. photo: 안천호. cop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copy;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Donald Judd, 〈Untitled〉, 1985, 채색 알루미늄, 30x150x30cm. photo: 안천호. cop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Donald Judd Art copy;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Q 아티스트 서도호도 텍사스 마르파를 방문한 뒤 “저드가 개조한 은행 건물의 구성이 한국적”이라며 “도서관에 방대한 양의 한국 미술과 건축 서적이 있다”고 언급한 적 있다죠. 생전에 그로부터 한국이나 동양의 건축과 미술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까? 

A 한국에 대한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셨어요. 당시의 그는 정말 젊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을 떠나고 나서 더욱 많은 생각과 배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배우는 분이었어요. 아마 한국을 떠난 뒤에도 계속 연구하고 공부하셨을 겁니다. 1947년과 1990년 사이의 큰 공백 동안에도 말이죠.

Q 육방형 구조물의 분할 방식은 명확한 공간, 즉 의도적인 비움을 암시합니다. 한국에는 ‘여백의 미’라는 말이 있죠. 정반대의 성질도 있습니다만 ‘비움’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작업과 통하는 점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A 여백(emptiness)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충분한 여백이 없으면 공간도 없죠. 아버지는 항상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작품을 전시할 때, 작품과 작품 사이에 더 충분한 여백을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뉴욕의 101 스프링 스트리트와 텍사스 마르파의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Q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아버지로서 그와 당신의 사적이고 애틋한 에피소드 하나만 들려준다면요? 

A 언젠가 스프링 스트리트에서 긴 하루를 마치고 윤형근 작가와 저녁식사를 가졌던 적이 있어요. 아마 식사와 함께 술도 곁들였던 것 같아요. 윤형근 작가가 아버지에게 “삶과 예술 모두 중요하지만, 예술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에 대해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요”라고 하시더군요.

Q ‘아빠 친구’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과 로니 혼(Roni Horn)이 매주 술 마시러 자신의 집에 놀러 오는 특별한(혹은 평범한) 경험이 청소년이었던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나요? 기억나는 장면이 있나요? 

A 저와 여동생 레이너는 엄청난 특권을 누렸죠. 그 당시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인 굉장한 동네에서 자랐고. 그들을 거의 매일 봤으니까요. 그 순간들, 당시 1970년대의 소호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미국에서는 재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가능할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셨어요. 언젠가 아버지가 파티가 열리는 2층에 키가 큰 스피커를 설치했던 적이 있어요. 데이비드 노브로스가 그 스피커에 몸을 기대다가 창문 밖으로 스피커가 떨어졌던 기억이 나네요. 다행히 잘 구조되었습니다.

Q 뉴욕 스프링 스트리트에 소재한 도널드 저드의 스튜디오가 다시 문을 연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고심 끝에 작품을 소장하여 작가의 뜻을 기리기로 결심했었죠. 돌이켜보면 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가치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요? 

A 언제나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저희의 경우 1994년 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결정의 순간이 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작품을 보존하고 유지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판매해주기를 바랐죠. 하지만 우린 작가가 어떤 것을 원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뉴욕과 마르파에 소재한 공간들을 잘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 말이죠. 그래서 저희는 일단 시도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보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어 실패할 수도 있었지만 시도는 해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뉴욕의 공간을 되돌렸고 이제 마르파에 있는 건물을 복원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마치 성형외과 의사처럼, 매일의 예측불허와 싸우고 있습니다.

Q 도널드 저드가 미니멀리즘이라는 라벨링에 대해 매우 짜증스러워했던 건 유명하죠. 그에게 미니멀리즘은 게으른 예술가들의 면피이자 마케팅이었으니까요. 선견지명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늘날 미니멀리즘은 상업화의 극단이 되었죠. 상업으로서의 미니멀리즘에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은 사유로서의 미니멀리즘을 위해 예술로 피신합니다. 이런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하나요? 

A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술가들이 그들의 고통에 몫을 더하진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Q 도널드 저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알루미늄 상자의 도면을 공장에 보내고 최종 제작품을 받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고치지 않고 바로 갤러리에 설치했다죠. 그렇다면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결정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나요? 

A ‘제작’이 끝나면 작품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복잡한 것은 없어요.

Q 도널드 저드는 “예술은 실제로 존재하기에 유토피아 같은 것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예술을 마주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A 저는 삶과 예술을 구분하지 않아요. 예술은 어떤 물건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도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하늘도 감상할 수 있지만 하늘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예술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예술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주죠. 생각을 표현한 것이 예술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흥미롭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요.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몰라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뿐.

 
※ «도널드 저드 개인전»은 9월 4일부터 11월 4일까지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린다.
 
손안나는 〈바자〉의 피처 디렉터다. 저드의 예술작품은 못 사더라도 언젠가 저드의 가구 하나쯤은 구매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것이 설사 ‘제3의 자세는 서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지독하게 불편한 의자일지라도.


글/ 손안나 사진/ ⓒ 타데우스 로팍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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