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 / 모요사
15년 동안 미술 기자로 일한 저자가 밀도 있게 쏟아낸 이 에세이집은 아마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토스카나 시에나에 있는 카스텔로 디 아마의 아트 프로젝트, 카셀 도쿠멘타, 베니스 비엔날레를 보러 다니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히토 슈타이얼의 기자 간담회에 참석하고, 현대무용가 이양희 씨, 산수화 작가 박한샘 씨와 친분을 나누는 와중에 한남동의 작은 갤러리 디스위켄드룸의 전시도 놓치지 않는 저자의 행보를 글로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인생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평소 가까운 미술 기자 후배로 그를 지켜보다 보면 실상은 좀 더 경이롭다. 한 손에 녹음 기능을 켜둔 아이폰을 들고 한남동 일대를 휘휘 돌아다니고, 이태원 바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봐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면, 자신의 사주에 ‘정신의 역마’가 있다는 저자의 말을 믿게 된다. 이는 얼마나 큰 축복인가. 당신이 직접 온갖 갤러리와 파티와 미술 여행에 다녀오지 않아도 이미 분주하고 바쁘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시대 미술의 현장과 저변을 취재해준 기자가 있다는 사실이.
박세회
마크 피셔 / 리시올
영국의 평론가 마크 피셔는 ‘문화 연구(Culture Study)’를 꼭 ‘컬트 스터즈(Cult Studs)’라고 쓴다. 단순히 축약어나 애칭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번역가의 부연에 따르면 그 의도는 명백한 조롱이다. 마크 피셔는 “담론이 거의 빈사 지경에 이른” 영국의 문화 연구 일반에 숨김없이 반감을 표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블로그 ‘k-펑크’는 사건들을 평면화하고 공리주의적으로 귀결하는 당대 비평의 흐름에서 벗어나, 오직 흥미롭고 유의미한 관점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마크 피셔 사후에 블로그 게시물(2004-2016)과 미발표 원고를 엮어낸 선집이 국내에까지 번역 출간된 것도 그런 이유다. 그의 글과 태도가 시대와 문화권을 넘어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영화 〈배트맨 비긴즈〉를 자본주의 실패에 대응해 등장하는 제각각 ‘선’들의 대결로 고찰한다거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묘사하는 출산이 불가능한 디스토피아에서 반복과 재조합만이 남게 된 현대의 문화적 위기를 포착한다거나 하는 이 대담하고도 풍부한 글들은 무엇보다 ‘쾌감’을 준다.
오성윤
아카세가와 겐페이/ 안그라픽스
종종 인스타그램에 #토마손(トマソン)을 검색해보곤 했다. 쓸모는 없지만 부동산에 부착돼 그 환경의 일부로 보존된 구조물을 가리키는 단어다. 오를 수 없는 육교나 막힌 벽에 딱 붙어 그저 오르내리기만 할 수 있는 계단 그리고 허공에 매달린 문 등 존재 자체로 모순적인 모습에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겠다. 저자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바로 이 토마손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제대로 된 몸체는 있으나 도움 되는 기능이 없고, 사람들이 정성스레 보존하고 있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예술을 넘어선 무언가라는 의미에서 ‘초예술’이라고 한 것이다. 저자가 본인이 발견하거나 제보를 받은 토마손 사진을 모아 낸 책이 4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한국에 드디어 번역 출판되었다. 어딘가 위화감을 조성하고 궁상맞은 구석도 있는 토마손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감상하다 보면 익숙하게 지나다니던 거리 풍경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참고로, 토마손이라는 이름은 야구선수 ‘게리 토머슨’에게서 따왔다. 다소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 이유는 책을 통해 확인해보자.
김현유
연상호, 최규석/ 문학동네
감독 연상호와 만화가 최규석의 협업은 처음이 아니다.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만들어진 웹툰 〈지옥〉 역시 연상호가 스토리를 만들고, 그림은 최규석이 그렸다. 둘은 같은 대학교를 다니며 친해진 오랜 친구 사이로, 연상호라는 이름을 알린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의 원안을 그린 것도 최규석이다. 연상호의 전작과 달리 〈계시록〉에는 좀비나 괴물 같은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성공에 눈먼 목사’와 ‘복수심에 불타는 형사’라는 다소 뻔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스토리는 뻔하지 않다. 언젠가 뉴스에서 봤을 법한 기묘한 사건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여 이야기에 현실성도 더했다.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인물들과 계시록이라는 신앙적 요소를 이용해 ‘과연 선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이 핵심이다. 여기에 6월 민주항쟁을 소재로 한 〈100°C〉와 비정규직 투쟁을 다룬 〈송곳〉 등 사실주의 작품을 연재하며 쌓은 최규석의 내공이 더해져 웹툰처럼 한 번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운 흡인력까지 갖췄다.
박호준
EDITOR 박호준 PHOTO 모요사/리시올/안그라픽스/문학동네 ART DESIGNER 김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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