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개인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이정배 작가는 대도시에 존재하는 자연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빽빽한 도심 빌딩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산, 매립으로 직선화된 해안선, 아침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네모난 모양의 빛 같은 것들이다. 흔히 도시와 자연을 분리해 생각하거나 도시로 인해 자연이 사라지는 것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곤 하지만 이정배는 분절된 풍경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도시의 분절된 자연을 소재로 작업하는 이정배의 개인전이 서울 창덕궁 옆에 있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김수근이 설계한 옛 공간 사옥에 자리 잡은 아라리오뮤지엄 전시장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녹색 '빛의 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3.3m 높이의 이 작품은 도시의 건물 사이로 슬쩍 보이는 산의 모습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냥 녹색인 것만 같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미묘한 색과 질감이 느껴진다. 색을 칠하고 사포로 갈아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얻어진 색과 질감으로, 색을 여러 차례 쌓아 올리는 동양화의 채색 기법이 반영됐다.
'빛의 산'을 뒤에서 태양처럼 비추는 노란색 작품 '찬란한 햇빛'은 고층 빌딩 뒤로 해가 지면서 햇빛이 회절해 건물 위로 비치는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한밤중 집안 창을 통해 들어와 벽에 비친 달빛을 형상화한 '뾰족한 달빛'도 역시 투명한 칠을 수백번 겹겹이 쌓는 방식으로 오묘한 달빛의 느낌을 살렸다.
전시장 구석 작은 공간에는 고층 건물 사이로 작게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금의 인왕산'과 '은의 인왕산'이 놓였다. 각각 23돈(약 86g)의 순금과 순은을 가공해 얇게 작업한 것으로, 가장 순수하고 값진 재료로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가로 4cm, 세로 9.5cm의 작은 크기지만 물질감에서 오는 존재감이 대단하다.
작가가 수집한 돌과 나무를 이용한 '돌과 나무의 드로잉' 연작은 새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목가구를 만드는 등 나무를 오랫동안 만져온 작가는 수석을 평평하게 갈아내고 잘 재단된 나무에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한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며 산수화를 많이 그렸던 작가는 동시대적인 산수화가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2차원의 회화 대신 입체에 눈을 돌렸다.
전시 개막일인 지난달 2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산수화가 동시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질문했고, 만들지 그릴지를 고민했다"면서 "만질 수 있고 실재하는 무게와 색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11일까지. 유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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