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머리 앨리스는 렘브란트가 그린 '63세 자화상'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인생 그림"(all time favorite)이라고 말했었다. 시간이 넘쳐났고 무척이나 자유로웠던 연수 시절이었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한 시간가량 진행하는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는 건 소소한 낙이었다. 앨리스는 열정적이고 매력적인 가이드였다. 그의 그림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멋지게 그림을 얘기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만큼. 앨리스는 맞은편에 걸려있는 렘브란트의 '34세 자화상'과 비교하면서 한 인생의 정점과 추락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로 나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생의 굴곡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일찌감치 뛰어난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말년에는 가족과 재산을 몽땅 잃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63세의 자화상'은 그가 숨지기 몇 달 전에 그렸다. 서울에서 다시 봐도 그 눈빛과 표정은 갖은 상념을 부른다.
최근에 서울의 한 고교 독서동아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나의 첫 책을 읽고 모인 10대들 앞에서 때마침 서울에 와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 얘기로 서두를 열었다. "여러분, 책 잘 읽었는지 퀴즈 하나 내볼게요. 책에 렘브란트가 숨지던 해 남긴 자화상이 나오는데, 그때 몇 살이었죠?" 모를 거란 예상이 빗나갔다. "63세요!" 답을 맞힌 학생이 기특했고 뿌듯했다. "우와~" 칭찬해 줬더니 "마침 그 챕터만 읽었어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기뻤다.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내셔널갤러리 22번 전시실에 걸려 있던 그림 한 점의 기억이 시간을 따라 당도한 곳이 지금, 해맑은 10대들 앞이었다.
별일도 아니지만 별일처럼 여겨본다. 런던에서 렘브란트의 말년 자화상을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런던에서 본 그림을 서울에서 다시 본 사람이 나뿐만이 아닐 것이며, 강연 중에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언급한 강사 또한 숱하게 많겠지만…… 내겐 이 모든 순간들이 특별해졌다. 드문드문 지나온 점들을 이어 선을 긋게 된 것 같다. 4년 전엔 오늘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그때가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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