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의 아파트

박철수의 아파트

엘르 2023-04-01 00:10:01 신고

마포아파트 Y형 주거동 측면부와 어린이놀이터.(출처: 대한주택공사 홍보실/ 도서출판 마티 제공)


마포아파트 Y형 주거동 측면부와 어린이놀이터.(출처: 대한주택공사 홍보실/ 도서출판 마티 제공)



성실하고 집요하게 한국 보편의 집을 탐구해 온 연구자가 얼마 전 별세했다.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향년 64세. SNS 속 무수한 추모에는 깊은 애정과 슬픔 어린 고백이 넘실거렸다. 예민한 촉수로 그러모아 근현대 주거사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박철수의 저서 〈한국주택 유전자〉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관사와 사택부터 비로소 한국사회의 주요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집을 촘촘히 좇는다. 근현대 주거 형식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어마어마한 목차를 보면 그가 주거문화사를 연구해 온 시간이 헤아려진다. 박철수에 따르면 한국주거사에서 지난 100년 동안 세상에 출현해 이름을 얻은 주택의 유형은 약 100여 가지. 100년여 세월에 걸쳐 변화를 겪어온 한국주택의 유전자를 정의하는 〈한국주택 유전자〉는 30년간 수집한 기록물과 이미지를 바탕으로 6년에 걸쳐 완성됐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가장 보통의 집’ 이야기는 700쪽이 넘는 책 두 권으로 이뤄진다. 처음 공개되는 행정 및 외교 문서, 건축 도면과 사진의 양은 압도적이다. 국가기록원,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의 문서고를 집요하게 살핀 덕이다. 후학들은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그는 자신이 어렵게 구한 자료를 후학에게 과제로 내주길 즐기는 연구자였다.

1969년에 지어진 이태원 탑라인아파트(출처: 대한주택공사, 〈주택 건설〉1976년/ 도서출판 마티 제공).


1969년에 지어진 이태원 탑라인아파트(출처: 대한주택공사, 〈주택 건설〉1976년/ 도서출판 마티 제공).



박철수는 2021년 〈한국주택 유전자〉로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62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 학술 부문에서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단한 작업이었지만 내용에 몰두하느라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책이 후속 세대에게 두루 읽히고 다채롭게 해석돼 한국건축사의 공극을 메우는 데 기여했으면 합니다.” 주거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담는 건축의 기본 단위이지만 그간 건축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기 어려웠다. 한국건축사 연구는 각 시대에 주요한 기능이나 목적을 지니고 대표 건축가의 설계로 탄생한 미술관과 박물관, 관공서 위주거나 작품에 가까운 단독주택 분야에서 이뤄졌다. 거대한 공백을 찾아내고 공동주거건축 연구에 몰두한 박철수는 일상의 터인 보통 사람들의 집에 주목했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한국 공동주택계획의 역사〉 (1999), 〈아파트의 문화사〉(2006), 〈아파트와 바꾼 집〉(2011),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2013), 〈근현대 서울의 집〉(2017), 〈경성의 아파트〉(2021) 등 50권의 저서 목록에서 간파할 수 있듯 박철수 교수는 보통의 집 중에서도 특히 공동주거건축, 아파트의 변화를 인상적으로 풀어냈다. 1930년대 경성이 아파트의 전성시대였음을 아는지. 박철수는 〈경성의 아파트〉에서 ‘1930년대 식민지 대도시 경성은 아파트가 넘쳐나던 곳으로 아파트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고 썼다. 박 교수가 책에서 밝힌 경성의 아파트만 70여 곳. 그는 부록에 경성 지도를 싣고 아파트 70여 곳의 이름과 주소, 규모, 준공 연도를 밝혔다. 인구가 폭발하고 집은 부족하고 집세가 폭등해 주택난을 겪던 시기, 아파트의 첫 등장을 알렸다.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그의 저술은 비로소 아파트를 투자와 욕망의 대상이 아닌, 일상의 터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아파트 키드’의 입장이라면 그의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탐구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69년에 지어진 이태원 탑라인아파트(출처: 대한주택공사, 〈주택 건설〉1976년/ 도서출판 마티 제공).


1969년에 지어진 이태원 탑라인아파트(출처: 대한주택공사, 〈주택 건설〉1976년/ 도서출판 마티 제공).



미취학 아동 때부터 학창시절에 이르기까지 십 수 년을 산 나의 아파트는 1기 신도시에 있었다. 동네 근린공원에서 만난 또래들은 자신의 동네를 단지의 숫자로 말했다. “1단지에 살아? 나는 6단지에서 왔어.” 아파트 단지의 숫자가 곧 사는 동네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고향을 물을 때 아파트 단지를 말해본 적은 없다. 처음 아파트에 입주한 날 창문 너머로 보이던 허허벌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곳이 주택 공급을 통한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투기 풍조를 해소하는 동시에 수도권의 기능 분담을 목적으로 건설된 수도권의 1기 신도시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성인이 된 후의 나 역시 아파트에서 기능과 가격, 욕망을 뺀 나머지는 큰 의미가 없다고, ‘고향’과 같은 정서적 뿌리가 담긴 대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2013년 저서인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박철수는 사람들의 기억과 관심이 살아 숨쉬는 장소를 모두 쓸어 없애는 아파트를 비판하며 말했다. ‘기회만 되면 언제든 넓은 아파트로, 재개발을 기다리며 갈아탈 준비를 구조화하는 지금의 아파트 단지는 찾아갈 고향이 될 수 없다.’ 영화감독 정재은이 다양한 아파트를 소환하며 엮은 영화 〈아파트 생태계〉(2017)는 도시학자부터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드 세대까지, 거주민의 생생한 육성을 빌려 아파트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고 더 높아지는 아파트에 질문을 던졌다. 영화에서 마주한 안타까운 결말은 아파트가 빨리 재건축되길 바라기에 일부러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도 박철수 교수가 1세대 도시학자로 등장한다. 박철수는 연구와 저술 활동뿐 아니라 한국주거 문화사를 탐구하는 자리라면 어디서든 열띤 목소리를 보탰다. 북서울미술관이 상계 신시가지 준공 30주년을 맞아 상계주공아파트를 다룬 전시 〈2017 서울 포커스 25.7〉전의 토크 프로그램 대담자로 참석해 상계주공아파트를 25.7평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도시로 살폈다. 아파-트, 아파-트멘트, 아파-트멘츠 하우스. 처음 등장했을 때 이와 같이 불리던 한국 근현대 아파트는 진실된 한 건축학자의 정성스럽고 열렬한 연구에 의해 이제야 명백한 서사를 품게 됐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 공사 현장. 1969년에 완공 후 이듬해 붕괴 참사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시민아파트의 꿈이 무너져내린 사건(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 공사 현장. 1969년에 완공 후 이듬해 붕괴 참사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시민아파트의 꿈이 무너져내린 사건(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살구나무 아랫집(@salguajc)’. 박철수 교수의 트위터 계정의 이름이다. 이곳에선 그의 방대한 사유와 온기 있는 인품이 읽힌다. 프로필에는 김애란의 〈입동〉 중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 했다.’ 그는 여기에서 사진가 노순택의 첫 번째 사진론 책 〈말하는 눈〉의 소식을 리트윗하고, 주택과 도시, 지역계획 연구실인 ‘HURPI’의 구술집과 〈둔촌주동아파트 단지의 생애〉 출간 소식을 들뜬 마음으로 기대하며 홍보했다. 지난 연말에는 〈경성의 아파트〉 개정 증보판를 위해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전했다. 참으로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순수한 열정, 겸손함으로 빛나던 학자였다. 그 역시 아파트를 떠나 살구나무집이라는 ‘땅 집’에 터를 잡아 살았다. 박철수 교수는 아파트를 벗어나며 품은 기대와 욕망을 현실로 만들며 살았을까. 정림문화재단의 〈건축신문〉을 통해 그는 고단하고 권태롭게 느껴지는 아파트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탈주를 꿈꾸는 이들에게 살구나무집 짓기의 과정을 나누며 한국주거문화의 현실을 냉담하게 진단하기도 했다.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 박정현에 따르면 박철수 교수는 〈한국주택 유전자〉에서 다룬 마포 주공아파트를 확장하는 작업을 최근까지 계속하고 있었다. 2022년 여름, 도서출판 마티와 〈마포 주공아파트〉의 출간 계약을 마쳤고 모두 12개의 장으로 구성된 초고와 방대한 자료 뭉치를 출판사에게 맡겼다. 마티는 이를 잘 다듬어 엮어내기 위해 준비 중이다. 보통 사람들의 집에 오랜 시간 주목해 온 훌륭한 학자이자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그가 전해줄 또 다른 봄을, 기리며 기다려본다.

세운상가아파트(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세운상가아파트(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979년 준공된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 이전 모습. 아파트 단지의 나이만큼 키 큰 나무들이 동과 동 사이를 가득 채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1979년 준공된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 이전 모습. 아파트 단지의 나이만큼 키 큰 나무들이 동과 동 사이를 가득 채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포아파트의 항공 사진(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마포아파트의 항공 사진(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마포아파트 A형 주거동 입면 상세(출처: 대한주택공사 홍보실/ 도서출판 마티 제공).


마포아파트 A형 주거동 입면 상세(출처: 대한주택공사 홍보실/ 도서출판 마티 제공).


1988년 준공된 서울 방이동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얼마 전 재건축을 위한 안전진단을 통과했다.


1988년 준공된 서울 방이동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 얼마 전 재건축을 위한 안전진단을 통과했다.


재건축되기 전의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되기 전의 둔촌주공아파트.


1971년에 준공돼 서울 여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시범아파트 역시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1971년에 준공돼 서울 여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시범아파트 역시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에디터 이경진 사진 PYO KI SIK CHOI YONG JOON 아트 디자인 김려은 디자인 장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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