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워싱턴에서 혼돈의 시작을 목격했다

나는 워싱턴에서 혼돈의 시작을 목격했다

에스콰이어 2022-12-06 18:00:00 신고


그날따라 날씨는 더 눅눅하고 춥게 느껴졌다. 2021년 1월 6일의 이야기다. 그날,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은 워싱턴D.C.에 모여 대선 불복 집회를 열 예정이었다. 오후 들어 미국 의회가 조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최종 확정할 계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친위 세력은 ‘2020년 대선 결과를 도둑맞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고,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야 했기에 이날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현장을 르포 기사로 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취재팀과 함께 백악관과 워싱턴 기념탑 사이 컨스티튜션 애비뉴(Constitution Avenue)로 나갔다. 워싱턴 기념탑 앞은 한국으로 치면 시청 앞 광장 같은 곳이라, 백악관 근처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다. 이미 트럼프는 수차례 집회를 예고하며 수만 명의 지지자들을 이곳에 불러 모은 상태였다. 트럼프 친위 세력 대부분은 헬멧을 쓰고, 방탄조끼를 착용한 채 등장했다. 가방 안에 총기를 소지한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도 있었다. “왜 이런 복장을 하고 나왔나요?” 그들의 답은 비슷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트럼프 친위대는 트럼프를 응원하는 의미를 담은 깃발을 소품처럼 흔들었다. 일부 지지자들은 연설을 하러 나온 트럼프를 더 잘 보기 위해 가로수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나무가 부러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수만 명이 모였지만, 트럼프가 연설을 시작하기 직전에는 드넓은 광장에 잠시 깊은 침묵이 흘렀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서는 음산한 날씨만큼이나 비통하고 우울한 감정이 느껴졌다.
트럼프의 연설은 매운맛을 넘어 ‘독한 맛’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는 도둑맞은 선거 결과를 되찾기 위해 ‘죽도록 싸울 것’을 주문했다. ‘의사당에 몰려가라’고 선동했다. 정치적인 품위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물리력으로 선거 결과를 빼앗자는 선동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말 폭탄은 지지자들을 폭발시키기 충분했다. 연설이 끝나자 지지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의사당을 향해 행진했다.
이미 트럼프는 2020 대선 결과에 불복한다며 법원에 제기했던 소송에서 모두 지고, 패배가 확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지자들에게 그런 팩트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통령 자리를 바이든에게 도둑맞았다는 믿음을 유지하려면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그들은 법원이 비밀조직 ‘딥 스테이트(Deep State)’에 장악돼 바이든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믿으며 법원을 비난했다. 당연히 ‘딥 스테이트’는 음모론 속에만 존재하는 조직이지만, 그들에겐 현실이었다.
행진을 시작한 사람들을 취재하며 이 같은 ‘팩트’를 언급하자 화를 냈다. “대선의 진정한 승리자는 트럼프다!” 그들은 선거가 조작됐다는 근거에 대해 묻자 페이스북과 유튜브에서 본 가짜 뉴스를 언급했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포스트〉처럼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가짜 매체’를 멀리하라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기초부터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들과 더는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울분을 쏟아내던 지지자들은 이전 집회에서는 보지 못했던 폭력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유국가에서 마스크를 왜 쓰는 거냐”며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고, “중국 놈들은 꺼져라”며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그동안 만난 트럼프 지지자들은 사실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순진하기에 선동도 잘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트럼프의 독한 연설은 순박한 이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폭력성을 완전히 이끌어낸 듯했다. 의사당 앞에 몰려간 트럼프 지지자들은 결국 선을 넘었다. ‘만일의 사태’가 바로 이것이었을까. 그들은 경찰이 친 바리케이드를 넘고 의사당 벽면을 기어올랐다. 창문을 깨부수고 의사당 내부에 진입해 의회의 대통령 확정 절차를 중단시켰다. 미국 역사상 연방 의사당이 침탈당한 건 영국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며 워싱턴D.C.에 불을 질렀던 1814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대사에는 전례 없는 일이라는 소리다.
일부 시위대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찾아다니며 “교수형에 처하라”고 외쳐댔다.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상하원 합동회의를 주관한 펜스가 대선 승자는 트럼프라고 선언하지 않은 것에 분노한 것이다. 시위대는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의사당을 휘젓고 다녔고, 일부는 인종차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남부 연합기를 연방 의사당에 들고 들어오기도 했다. 아수라장이었다. 초유의 사태에 겁에 질린 의원들은 황급히 대피했고, 의사당 근처에는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발사한 최루 가스가 매캐하게 퍼졌다.
공권력이 진압에 나섰지만, 혼란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의원들이 있는 공간으로 창문을 부수고 넘어가려던 일부 시위대에 총을 발사했다. 큰 방패로 무장한 주 방위군도 투입돼 시위대를 밀어냈다. 근처에 서 있기만 해도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거친 그들의 모습은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힘으로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던 시도는 결국 의사당에 핏자국을 남기고 종료됐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시궁창에 처박혔다.
나는 이 모든 혼란의 기간 동안 역사의 현장에 머물렀다. SBS 특파원으로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정보의 형태로 가공해 전달하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은 ‘도대체 왜’였다. 왜 이들은 의사당에 난입하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걸까? 미국에서 공공기관에 무단으로 난입하는 건 속된 말로 ‘총 맞을’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무모한 일이다. 폭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현장을 목도한 후, 의사당에 들어갔다 나온 이들에게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고 물었다. 그들의 답은 충격적이었다. “의사당의 주인은 국민인데, 주인이 자기 집에 들어가서 불법행위를 감시하는 게 뭐가 문제요?” 그게 바로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 사전에 광범위하게 공유된 ‘거사의 이유’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새 시위가 일어난 지는 만 2년이 되어가고, 트럼프는 의사당 폭동 사태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그사이 나는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황이 크게 좋아지지도 않았다. 이번 미국 중간 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들 가운데 2020 대선 결과를 믿지 않는다는 이는 300명이 넘는다. 여당도 아닌 야당 권력자들이 부정선거를 통해 대선 결과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는 출마자가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근거는 없다. 출마자들이 부정선거의 증거라며 주장했던 것 중 어떤 것도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사실 관계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트럼프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아 공화당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고해성사’를 하는 게 통과의례였을 따름이다.
그들이 선거를 빼앗겼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들의 영향력이 너무나 크기에,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집어버린 친위대의 폭력성이 언제라도 다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미국 의사당 폭동 사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갖고 있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먼 나라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미국 중간 선거가 시작됐다. 박빙의 승부인 만큼 선거 결과가 불러올 파장은 커 보인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워싱턴D.C.의 음울했던 그날 이후 세상은 그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혼돈 속에 빠진 것이 아닐까?

김수형은 SBS 기자로, 2019년 1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워싱턴 특파원으로 재직했다.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 〈워싱턴 인사이트〉를 썼다.


EDITOR 김현유 WRITER 김수형 ILLUSTRATOR MYCDAYS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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