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노의 예술적 순간들

발렌티노의 예술적 순간들

바자 2022-09-25 00:00:00 신고

 
I LOVE BEAUTY, IT’S NOT MY FAULT
‘발렌티노’라는 강렬하고 우아한 패션의 성을 쌓은, 패션계의 마지막 황제라 불리는 발렌티노 가라바니. 그가 올해 90세 생일을 맞이하며 자신의 고향 보게라에서 특별한 전시를 열었다. 지난 5월 진행된 90주년 기념 전시에서는 1960년대부터 21세기 전반부를 아우르는 발렌티노의 익스클루시브 작품을 극적인 연출을 통해 선보였다. 무대 중앙을 채운 건 역시나 발렌티노 레드 드레스다. 팬톤 차트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발렌티노 레드’는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패션계에 남긴 가장 확고하고 강력한 유산이다. 이 상징적인 드레스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모노크롬 쇼의 여인들 역시 발렌티노 메종 정신을 고스란히 반영한 36벌의 아카이브 드레스를 입고 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던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인생이 이 전시 속에 응축되어 있다.
 
제임스 제이미 나레스(1953년, 런던)의 박력 있는 붓 터치로 리듬감이 극대화된 드레스.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단일하지만 복잡한 획으로 구성된 브러시 스트로크를 활용한다. 파트리샤 트레입(1979년, 미시건)의 회화는 감각적 디테일, 부재, 관점의 전환으로 구성된다. 화이트 드레스를 캔버스 삼아 그린 그림에서‘보는 즐거움’이 넘쳐난다.
VALENTINO DES ATELIERS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춀리(Pierpaolo Piccioli)는 패션에 오트 쿠튀르가 있다면, 현대미술에는 회화가 있다고 여긴다. 그는 아티스트가 자신의 사유를 캔버스 위로 옮기듯, 장인의 손으로 한땀 한땀 지어진 또 다른 사유의 결과물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 둘의 공통점을 결합한 2021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야말로 현대예술의 지휘자가 된 피엘파올로 피춀리는 창작자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다양한 연령대, 배경, 미적 성향을 지닌 화가들을 아틀리에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아틀리에의 장인과 회화 작가들의 대화는 3차원적 드레스 위로 옮겨졌다. 가볍게 떠다니는 모자부터 웅장한 드레스 가운에 이르기까지, 선명한 컬러를 더하고 자유로운 드레이프를 연출해 유연한 움직임까지 작품의 요소로 승화시켰다. 패션과 예술은 건강한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실험적인 번역 과정을 통해 하나의 입체적 정물을 탄생시켰다.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이외에 어떤 목적도 갖지 않지만, 패션은 실용적인 영역에 포함되며 기능과 활용성을 갖는다. 이 둘의 차이점을 인지하는 것은 호기심과 열정, 존중을 담아 서로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첫 번째 단계다. ‐ 발렌티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춀리
 
THE NARRATIVES
발렌티노 레드를 잇는 발렌티노 핑크 위에 적힌 이 문장은 발렌티노가 최근 선보인 패션 없는 패션 광고, 내러티브 캠페인 II의 하나다. 2021년부터 진행되는 내러티브 캠페인이 올해는 ‘사랑’을 주제로 여러 형태와 의미가 담긴 문학의 한 구절을 캠페인으로 꾸몄다. 이미지로부터 시작해 이미지로 끝나는 패션의 세계에서 오직 타이포로만 구성된 광고 캠페인을 선보인 건 그야말로 새로운 발상! 하지만 우린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서 문학은 더 독보적인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정세랑 작가를 비롯해 17명의 작가의 목소리가 컬러풀하게 담긴 캠페인은 예술과 패션의 조합 중 가장 진보적인 형태가 아닐 수 없다. 문학과 메종의 연대, 발렌티노가 존경해 마지않는 문학의 위상을 담은 내러티브 캠페인은 단순히 광고로서 끝나지 않는다. 발렌티노는 문학을 통해 형성되는 커뮤니티를 지지한다. 실제로 전세계 독립서점을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화가 살아 있는 전통적인 커뮤니티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지키고 있다. 
 
언젠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을 초콜릿 바를 받듯 가벼이 받았었다. 나의 마음, 꺾인 부분에서는 잔 가루들이 날렸는데. ‐ 정세랑 
 
불완전하면서도 완전한 조합으로 발렌티노 백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낸 에밀리오 빌라바(Emilio Villalba). 오 드 라발(Oh de Laval)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강렬한 작품 속 여인과 가방. 개성이라는 공통분모로 발렌티노 원 스터드 백을 해석한 조르지오 셀린(Giorgio Celin).
VALENTINO ON CANVAS
패션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피춀리는 “예술이란 가장 개인적인 감정의 본질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창구”라고 얘기한다. 그렇기에 종종 그는 자신이 만든 패션 아이템은 예술가들에게 토스한다. 하나의 피사체가 된 발렌티노의 아이템이 예술가들의 붓질을 통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 올해 초 발렌티노는 전 세계 아트 신에서 주목받고 있는 세 명의 화가와 함께 발렌티노 랑데부 컬렉션의 원 스터드 백에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히는 ‘발렌티노 온 캔바스 캠페인’을 진행했다. “나의 작품과 원 스터드 백은 모두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1990년생 오 드 라발의 말처럼 자신만의 신 에로티즘을 투영한 작품은 럭셔리 백과 펑키한 스터드 장식 같은 아이러니한 조합을 이뤄낸 원 스터드 백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부서진 얼굴과 떠다니는 신체 부위를 묘사하는 불완전한 초상으로 알려진 에밀리오 빌라바는 2019년에 이어 이번에도 발렌티노와 함께했다. 이전의 작업이 가방과 옷 위에 자신의 그림을 올렸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캔버스 안에 발렌티노의 원 스터드 백이 녹아들었다. 또한 모든 작품에 자화상을 담는 콜롬비아 태생의 조르지오 셀린 역시 ‘개성’이라는 백과 자신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THE WRITER’S ROADMAP
문학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기형의 문학은 의식 속에 들어와 예상할 수 없는 형태로 진화한다. 발렌티노는 잠재적인 문학의 힘을 굳게 믿으며 그 힘이 우리들 사이에 더 깊게 존재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패션 하우스로는 드물게 문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행위 중 하나가 발렌티노와 작가 토미 아데예미가 운영하는 문학 과정 ‘라이터스 로드맵’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2020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며, 네뷸러상과 휴고상을 수상한 소설가 토미 아데예미는 라이터스 로드맵을 통해 젊은 학생들의 의식 속에 ‘예술로서의 문학’이 뿌리내리게 만든다. 총 50명에게 장학금과 함께 이들이 소설을 구상, 계획,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제공하며 신예 소설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발렌티노는 세계적으로 문화적 인지도를 높이고 문학, 글쓰기, 교육을 지원하며 지역사회에 대한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조성함으로써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꿔나가는 행위자가 되고자 한다. 10주에 걸친 프로젝트를 통해 발견될 ‘목소리’가 새로운 세상을 또 얼만큼 변화시킬지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예술의 패션적 재해석
발렌티노를 정의하는 코드로 오트 쿠튀르, 아틀리에, 스터드와 V로고 등을 꼽는다. 2021년 말, 발렌티노는 중국 베이징 SKP 사우스(SKP South)의 T-10에서 이 코드들을 패션이 아닌 예술이라는 은유를 통해 〈발렌티노 재해석 파트 II, 베이징〉 전시를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 아티스트의 작품과 발렌티노의 작품은 모두 ‘도시와 몸’이라는 공통 주제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옷과 작품의 관계는 분석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고 단순한 자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직관적인 관계는 보는 이에게 골치 아픈 해석이 아니라 즐거운 숨은그림찾기 게임처럼 느껴진다. “나는 패션이야말로 강력한 의사소통의 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 힘은 동시대성과 연결되어 있다. 재해석이야말로 미래를 위해 아주 자연스러운 코드라고 할 수 있다. 재해석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브랜드에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원천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피치올리의 말처럼 발렌티노는 한국 작가 이수경을 포함해 닉 나이트, 야코포 베나시, 조엘레 아마로, 차오페이 등 작가 17명의 작품과 옷을 연계해 강력한 내러티브를 전했다.
 
김민정은 주말 미술관 나들이로 주중 피로를 푸는, 예술이 그저 좋은 프리랜스 에디터다. 


글/ 김민정 사진/ 발렌티노 제공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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