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시인 "이 세상 견디려면 얼마나 더 사랑이 필요할까요"

진은영 시인 "이 세상 견디려면 얼마나 더 사랑이 필요할까요"

연합뉴스 2022-09-24 15:15:57 신고

10년 만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펴내

3주만에 1만부 판매…'그날 이후' 등 상실의 고통 헤아린 시 다수

10년 만에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펴낸 진은영 시인 10년 만에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펴낸 진은영 시인

[진은영 시인 제공]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나는 당신에게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해줄 말들을 찾고 있어요."(존 버거)

진은영(52) 시인은 신작 시집 제사(題辭·책의 첫머리에 관련 노래나 시 등을 적은 글)에 영국 소설가 겸 비평가 존 버거의 말을 인용했다.

그도 지난 10년간 전할 말들을 고르고 또 고른 듯 했다. 시인의 말에선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이 흘러갔다"고 적었다. 그의 시가 마치 내 울음을 묵묵히 지켜봐 주고, 아픈 목소리를 경청해주는 '침묵의 위로'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애쓴 마음은 독자들 곁에 가닿았다. 시집은 출간과 함께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시 분야 1위에 오르고, 3주 만에 1만 부가 팔려나갔다. 시집으론 이례적인 수치다. 알라딘에 따르면 20~30대 여성의 구매 비율이 높다.

최근 연합뉴스와 전화로 만난 진 시인은 "세상이 저와 제 이야기 속 상처받은 분들을 따뜻하게 환대해주는 느낌"이라며 "여전히 우리가 같은 부분에서 슬퍼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려 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가져주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신작은 시력 23년 차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다. 그는 2012년 시집 '훔쳐가는 노래' 이후 꽤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2017년 건강 악화로 심장 판막 교체 수술을 받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아픔을 살피며 이듬해 정혜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대담집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를 펴냈다.

새로운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2013년부터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심리상담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데 공을 들였다. "문학을 통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시 쓰는 일이 뒤로 밀렸죠."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표지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표지

니체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의 시는 철학적 사유, 낯선 은유, 정치성이 두드러졌다. 작가주의적인 태도로 문학적 실험을 한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2008)과 사회적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인 세 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는 어렵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엔 사랑이란 큰 테두리 안에서 한층 친숙하고 선명한 표현으로 상실의 고통과 삶의 무게를 구체화했다. 시구 한 줄, 한 줄에 마음이 묶이는 건 그 때문이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청혼' 중),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빨간 네잎클로버 들판 중'), '빈속에 삼킨 정직은 우리의 창자를 찢으며 내려갑니다'('아뉴스데이, 새뮤얼 바버' 중)….

시인은 "문학상담 수업을 하며 학생들로부터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을 듣고, 그 얘기가 제 마음에 와닿으며 이전 시들보다 훨씬 타인의 존재가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시 속에 들어왔다"고 했다.

수록작 중 2014년 문예지에 발표한 '청혼'과 같은 해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유예은(단원고) 양의 생일을 앞두고 예은 양 목소리로 쓴 시 '그날 이후'는 온라인에서 널리 읽혔다.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만 입게 해서 미안'('그날 이후' 중)

시인은 "그간 청탁받은 시 중 가장 마음이 괴로운 시"라며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이를 대변하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아이의 고통은 상상 너머에 있어서, 예은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찾아보고 그 삶을 담아 전달했다. 이 친구들을 잊지 않도록 기억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도 소중한 시"라고 말했다.

시인은 여러 편에 걸쳐 예은 양과 다른 유가족의 고통을 때론 치유로, 때론 저항의 음색으로 치환해 써 내려갔다.

'나는 꿈에 못 박혀/ 아직 살아있답니다'('스타바트 마테르' 중),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다/ 바뀐 그림 하나 없이'('천칭자리 위에서 스무 살이 된 예은에게' 중), '진실이 어서 세상으로 나오기를/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온 심장처럼'('아빠' 중)

진은영 시인 진은영 시인

[진은영 시인 제공]

시인은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로 "사랑과, 사랑보다 조금 작은 환멸"을 꼽았다.

"연대나 사랑이 필요한 것은 천국에 있을 때가 아니라, 지옥에 있을 때라 한 존 버거의 말에 공감했어요. 매일 자살하는 것 같은 세계 속에 있을 때 '이걸 견디려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가'란 생각에 사랑을 부르짖은 것 같아요."

그는 "환멸도 어쩌면 거만하고 사후적인 감정"이라며 "정말 절박하고 고통받은 사람들 곁에 있으면 환멸이 자리 잡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뭘 할지 생각하게 된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 울고 있는 걸 지켜봐 준다거나, 소리 지르는 걸 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문학가나 예술가들도 대단한 영향을 미치겠다는 욕구를 내려놓고 "고통받는 존재를 생생하게 그려내며 잊히지 않도록 노력할 때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봤다.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그러니까 시는' 중)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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