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42>] 블랙&화이트

[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42>] 블랙&화이트

데일리안 2022-09-24 13:57:00 신고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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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블랙&화이트

장마가 끝나자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이글거리며 내리쬐는 햇볕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벽난로를 머리에 인 것 같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한낮의 열기는 산과 들과 바람을 뜨겁게 달구었고 아스팔트길은 진득한 아교풀처럼 녹아내렸다. 덕분에 해가 져도 열기는 식지 않고 그대로 남아 열대야로 이어지곤 했다. 사람들은 연일 계속 되는 열대야에 집을 지키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돌았다. 도심의 후텁지근한 열기를 피해서 수박과 캔 맥주를 싸들고 남강 둔치로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며 무더운 여름밤을 이겨나가고 있었다.

이철백은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은 택시 안에서 연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요 며칠 동안 해가 지기 무섭게 아파트촌에서 쏟아져 나온 일가족들이 택시를 잡아 세웠고, 밤에는 술집 골목에서 빠져나온 취객들이 택시를 잡아타고 강변으로 가자고 소리 질렀다. 모처럼의 호황에 이철백은 돈 버는 재미를 아주 쏠쏠하게 느꼈다. 평소보다 수입이 오십 퍼센트는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앞으로 며칠만 더 벌면 이달치 양육비를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철백은 시원한 택시 안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주에는 시간을 쪼개서 김석규에게 면회를 갔었는데 조만간 퇴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주치의 이희수는 김석규가 편집망상에선 거의 벗어났고 현재 알코올의존증을 치료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김석규가 처음 입원했을 당시엔 망상 때문이었는지 단주로 인한 금단현상은 없었는데 편집증이 어느 정도 치유된 이후에 잠복해있던 알코올의존증이 고개를 들더라는 것이었다.

김석규는 퇴원하면 곧장 복직하지 않고 휴직기간을 더 연장할 것이라고 했다. 아내 박미옥이 시청 공무원이라 경제적 부담을 덜은 김석규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월급을 받겠다며 출근하는 것보다는 당분간 치료를 겸한 요양에 매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이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건 물론 박미옥의 계산법이었다. 박미옥은 벌써 김석규가 머물 시골의 텃밭 딸린 빈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임봉식은 공무원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낙담하거나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고 더더구나 포기한 기색 또한 아니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하며 임봉식은 내년 합격을 목표로 꾸준히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동안 임봉식이 술을 입에 댄 것은 딱 두 번이었는데 그건 시험일과 발표일이었다. 시험일은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발표일은 불합격을 위로하는 의미로 아내 정수진과 함께 술을 마셨다. 임봉식은 그 이틀을 빼고는 꾸준히 금주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종탁은 음주 알리바이를 위해 블랙&화이트를 다녀간 이후 또다시 잠수를 탄 모양이었다. 한종탁은 술 마실 일이 있거나 술 마시고 난 이후에 전화질을 해대는 스타일이라 이렇게 조용할 때는 술을 내려놓았다는 강력한 방증이었다. 그래서 이철백은 평소에도 살갑게 연락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편하게 생각하며 굳이 먼저 연락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방선희와의 깨가 쏟아지는 동거생활도 이철백이 느긋하게 생활하는 데 한몫 단단히 해주었다.

이철백은 처음엔 방선희와 동거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날 방선희가 먼저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왔을 때 이철백은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며 펄펄 뛰고 고개를 절절 흔들었다. 하지만 그 제안의 이면에 지금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홍 기사의 스토킹이 있었고, 그로 인한 고통에 괴로워하던 방선희가 흠결 있는 여자라는 핸디캡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듭 요청해 오자 이철백은 마냥 도외시할 수 없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방선희의 고통을 생각하자면 당장에라도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결혼에 실패한 이혼남의 처지에 놓인 이철백에게 동거생활은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쨌든 치열한 고민과 간절한 애원이 서로의 접점을 찾은 결과 이철백은 모텔생활을 정리하고 블랙&화이트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엔 월세를 아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가급적 서로에 대한 간섭을 자제하고 최대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방선희의 약속이 한결 효과를 발휘했다.

홍 기사는 지난겨울 방선희가 블랙&화이트를 열자마자 처음으로 방문한 손님이었다. 성긴 눈발이 날리던 저녁 무렵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혼자서 문을 밀고 들어온 홍 기사는 출입문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덩치가 컸다. 키는 180센티미터를 조금 넘었으나 약간 비만형의 몸집에 패딩점퍼를 입고 있어 실제로는 더 커보였다. 홍 기사는 이미 전주가 있었는지 불그레한 얼굴이었다. 방선희는 블랙&화이트의 첫손님이 되어준 홍 기사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앞으로 장사를 순조롭게 하려면 단골 확보가 관건이기도 했지만 장장 25년 만에 힘들고 어렵게 내려온 강주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가게를 찾아준 손님이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방선희가 10년 형기를 마치고 청주여자교도소의 육중한 철문을 나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출소자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마중하러 나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초겨울답지 않게 유난히 추운 날씨는 방선희의 작고 마른 몸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10년 전 가을 구속될 당시의 옷차림 그대로 입고나온 방선희는 잔뜩 어깨를 말아서 잰 걸음으로 사람들을 비집고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환한 햇살이 비치는 정류장 간의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방선희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따뜻한 남쪽의 고향 강주였다. 휴일 날 동생들과 함께 봄나들이 간 강주성의 촉석루와 의암바위에서 까르르 웃으며 사진을 찍었던 추억도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하지만 야반도주로 떠나온 강주를 다시 찾는다는 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따라서 실행에 옮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선은 딸 숙이가 눈에 밟혀 행선지를 대전으로 정해야 했다. 방선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회 온 바로 아래 여동생을 통해 숙이가 대전의 한 고아원에서 홀트 아동복지회를 거쳐 해외입양을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지 두 눈으로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대전의 홀트아동복지회에 도착한 방선희는 한동안 주위를 서성거렸다. 이제까지 엄마 노릇을 못한 못난 인간이 지금에 와서야 딸을 찾는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지, 만약 동생의 전언대로 해외입양을 간 게 사실이라면 그 다음엔 어떡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물어보고자 한들 주소는 물론 연락처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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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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