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눈의 시력이 거의 사라졌다. 그 이후 보게 된 것들

왼쪽 눈의 시력이 거의 사라졌다. 그 이후 보게 된 것들

엘르 2022-07-07 00:00:01 신고



다른 눈을 뜰 수 있다면
한 달 전쯤 공황 발작이 심하게 왔다. 계속되는 주치의의 입원 권유를 결국 수락했다. 병동에 반입 가능한 물품은 철저히 제한적이었지만 나는 군말 없이 짐을 챙겼다. 세면도구, 휴지, 실내화, 책…. 안에서 필요한 게 생기면 적어두고, 반입 가능한 물품이라면 보호자를 통해 받을 수 있다니 뭐가 불편할까 싶었다.

입원 절차를 밟고 내 이름이 적힌 팔찌를 찼는데 ‘낙상 주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혹시 자다가 떨어질 때를 대비한 매트도. “저 침대에서 안 떨어지는데요”라고 말하자 간호사는 “그래도 한쪽 눈이 안 보이시니까 사고가 날지 몰라서요. 혹시 모르니 치우시면 안 돼요” 라고 답하며 매우 정중하고 작은 목소리로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태도가 어쩐지 싫었지만 이내 ‘그럼 어떻게 물어봐야 되는데? 왜 이렇게 꼬였니?’ 생각하며 짧은 요약을 전했다. “10년 전쯤 녹내장을 뒤늦게 발견해서 왼쪽 눈 시신경이 거의 죽었어요. 그때 응급수술받고 지금까지 병원에 다니고 있는데 재발하지 않았어요. 오른쪽 눈은 멀쩡해서 움직임에 큰 지장도 없고요.” 간호사는 알았다고, 그래도 갑자기 어지럽다거나 몸이 불편할 땐 바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병동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입원 후 24시간은 스마트폰 반입이 되지 않고, 보호자와 통화도 불가능하다. 나는 병동에 있는 사이클을 1시간 탄 뒤 샤워했고, TV를 30분쯤 봤으며, 일기를 썼다. 시간이 딱 그만큼만 지나 있었다. 병동의 시간은 정직했다. 환경이 바뀐 탓에 잠도 오지 않았다. 가장 익숙하게 시간을 떼울 수 있는 건 독서였다. 나는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책만 읽었다. 병동은 무척 건조해서 젖은 수건도 금방 말랐다. 간호사에게 인공눈물 반입이 가능하냐고 묻자 가능하다고 했다. 일기장에 인공눈물을 적는 순간, 그제야 온열 안대가 떠올랐다. ‘내 필수품인데 왜 잊고 있었지?’

나는 침대를 박차고 나와 간호사에게 온열 안대 반입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스마트폰 외의 전자기기는 안 된다고 했다. ‘어떡하지?’ 잠이 달아났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손바닥을 비비며 소등 시간이 오길 기다렸다. 9시, 약을 먹고 불을 껐다. 어두워지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누워서 손으로 눈 주변을 마사지하면서 잠이 들길 기다렸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신기할 만큼 본격적으로 왼쪽 눈의 통증이 시작됐다. 통증은 이내 두통으로 번졌다. 관자놀이부터 뒤통수까지 번개 치듯 찌릿했다. 눈 감고 있어도 눈이 빠질 것 같았다. 이런 통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살금살금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제가 눈이 너무 아파서 그런데요. 혹시 핫 팩 같은 게 있나요?” 핫 팩은 없고 얼음 팩이 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제발 부탁드린다고 했다. 구원처럼 얼음 팩이 손에 쥐어졌고 1시간 정도 찜질했지만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30분이 더 흐르고, 다시 병동 문을 열고 진통제를 요청했다. 또 1시간이 지났다.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눈과 머리의 통증이 계속되자 희한하게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았다. 나는 또 뛰쳐나갔다. 소화제를 달라고 했다. 이때부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왜 인공눈물을 안 챙겼어? 그러게 책을 왜 그렇게 오래 읽었어?’ 나를 공격하는 말들만 머릿속을 맴돌면서 눈물이 흘렀다. 눈이 아프니까 울면 안 되는데 멈출 수 없었다. 민폐인 걸 알면서도 또 문을 열고 나갔다. 수면제를 달라고 했다. 눌러둔 자기연민이 울음과 함께 콸콸 터져나왔다. ‘왜 온열 안대 반입이 안 되지? 왜 난 이런 병에 걸렸지? 정신병만으로도 버거운데. 왜 눈까지 난리야.’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분노가 몰려왔다. 사실 내 잘못인데 말이다.

난 유전성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어릴 때부터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받아 발라왔다. 그리고 내성 때문에 등급을 한 단계씩 올리다가 결국 1등급 스테로이드까지 쓰게 됐고, 그 독한 약을 바른 채 눈도 비비며 살다가 스테로이드성 녹내장에 걸렸다. 그 시절이 자기연민의 최고조였던 것 같다. 아토피는 아토피대로 힘든데 시력까지 잃었으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해!’ 상태였다(왼쪽 눈 시신경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앞에 무언가 있다는 건 알 수 있다는 정도다). 가족 중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못했고, 실제로 다들 나를 불쌍하게 여겼다. 의사 선생님도 ‘꽃다운 나이에 어쩌다…’라는 대사로 내 불쌍함에 불을 지폈다.

그 시절엔 온통 ‘시각장애’에만 관심이 갔다. ‘언제 내 일이 될지 모른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보도블록은 이렇게 잘 깔아놓으면서 장애인 점자블록은 왜 안 깐 곳이 많은지. 점자블록을 따라 걷다가 중간에 끊겨 있는 것도 많이 봤고, 잘 나가다가 갑자기 버스정류장이 세워져 있는 길도 봤다. 시각장애인은 바로 부딪히라는 건가? 나는 화로 가득 차서 민원을 넣고는 했다. 그랬던 나도 어느 순간부터 이 삶에 익숙해졌다. 어쨌든 내 한쪽 눈은 멀쩡하고, 인공눈물과 두통약과 온열 안대와 함께하는 삶이라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눈에 대해 까맣게 잊은 채 입원했다가 이런 사단이 일어난 거다. 그렇게 울다가 수면제 때문인지 잠들었다. 식사하라는 말에 깨어나 보니 3시간쯤 지나 있었다. 눈은 여전히 욱신댔지만 전날보다 덜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너, 까먹고 있었구나.’

뭘? 내가 한쪽 눈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다. 그래서 간호사의 배려에도 괜히 기분이 나빴던 거다. 내 병만 까먹은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정까지 다 까먹었다. 더는 점자블록에도, 시각장애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쓴 글에서 마음의 눈을 새롭게 떴다더니 헛소리였다. 나만 불쌍한 거 아니다. 우리는 다 같이 충분히 불쌍하다. 그걸 알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나도 편해질 수 있는데 잊고 있었다.

나는 퇴원하지 않았다. 내 병을 잊어버리고 싶지도 않고, 나만 불쌍하게 여기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주치의는 최대한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안 되면 퇴원하자고 나를 설득했고, 친구 덕분에 올리브영에서 파는 1회용 온열 안대를 받을 수 있었다. 난 수건을 적셔 침대 옆에 걸어두고 온열 안대를 끼고 마사지를 했다. 인공눈물도 계속 넣으며 관리했다. 그리고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나를 불쌍하게 여겨도 되지만, 나의 경우엔 그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절망은 아무런 힘이 없다.

살면서 어떤 불행은 지치지 않고 찾아온다. ‘꽃다운 나이에 어쩌다’라는 의사의 말처럼 내게 연이어 찾아온 사건들은 ‘보통 인간’의 통상적인 노화 주기나 투병 시기보다 비교적 빠르게 찾아왔으며 그 때문에 무척 괴로웠던(여전히 괴로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서 알게 된 다른 것들, 보게 된 어떤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한때 알았으나 잠시 잊었던 타인의 고통과 존재하는 불합리들을 잊지 않고자 노력하겠다고, 가늘고 까끌까끌한 1회용 온열 안대의 온기에 기대 생각했다.

백세희 10년 넘게 겪은 경도의 우울증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다. 내 마음을 돌보는 일만큼 동물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에디터 이마루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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