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 동갑내기 부부가 한옥의 서정을 즐기며 사는 마음

90년생 동갑내기 부부가 한옥의 서정을 즐기며 사는 마음

엘르 2022-07-06 00:10:01 신고



현관 벽면에 3음절 한자어가 쓰인 목판이 걸려 있다. 밝고 윤택한 집이라는 의미를 담은 정고재. 아파트 현관에 당호를 붙인 집이라니. “밝은 빛과 윤택함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에요.” 최정선과 신우택.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가져오고, ‘윤택할 택’의 또 다른 음차인 ‘고’를 택해 붙인 당호는 그 자체로 집의 정체성이자 두 사람이 함께 설정한 삶의 목표다. 거실 한 모퉁이에선 장독 세 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또 다른 구석에는 개다리소반 위에 보름달 같은 조명이 떠 있는 집. 준공 10여 년 차 아파트에 한옥의 감성을 가져다 촘촘히 심은 집의 사연은 혜곡 최순우 선생의 책에서 시작됐다. “어릴 적 읽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알게 된 한국의 미학이 오랫동안 제게 중요한 레퍼런스이자 아카이브였어요.” 특히 최정선이 혜곡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장독대의 서정’이다. ‘장독들은 해묵은 놈일수록 은근하고 점잖아 보이고, 행주질을 많이 받은 놈일수록 길이 들어서 독은 야릇한 윤기를 더하고 소리 없는 즐거움을 주인에게 히죽이 표시한다. 그러나 장독들은 때로는 시무룩하고 때로는 허전해하며 또 슬퍼할 줄 안다.’ 수려한 문장으로 한국적 아름다움을 설파한 최순우의 글을 탐독하며 최정선은 자신만의 미감과 취향을 발견하고 탐색해 왔다.

짙은 나무 색의 가구들과 차가운 금속 프레임을 지닌 바실리 체어를 함께 둔 거실.


짙은 나무 색의 가구들과 차가운 금속 프레임을 지닌 바실리 체어를 함께 둔 거실.


어린 시절부터 한국의 멋이나 정취를 아름답게 여겼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가치 있고 귀하게 느껴지는 멋이니까요. 대학시절에는 건축을 전공했는데, 언젠가 제 공간을 갖게 되면 꼭 낡지 않은 전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죠.

달 착륙선을 모티프로 디자인된 노모스 테이블, 둥근 구형의 조명과 민화, 달 항아리, 장독을 좋아하는 취향이 드러나는 사물들과 신우택이 다섯 살 때부터 사용했던 나무 수납장이 이질감 없이 집안 곳곳에서 어우러진다.


달 착륙선을 모티프로 디자인된 노모스 테이블, 둥근 구형의 조명과 민화, 달 항아리, 장독을 좋아하는 취향이 드러나는 사물들과 신우택이 다섯 살 때부터 사용했던 나무 수납장이 이질감 없이 집안 곳곳에서 어우러진다.


서까래, 대들보, 전통 문양으로 짠 창살도 이들이 좋아하는 한옥의 세부이지만 아파트에 담기에는 과하다는 생각에 배제했다. 대신 안방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길목에 당겨서 여는 양개문을 설치하고 안방과 서재, 부엌에선 작은 창을 통해 맞은편 공간을 풍경처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동선이나 시선, 촉감의 측면에서 한옥이 지닌 여러 경험적 특징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곳곳의 크고 작은 창 너머로 너울너울 집의 다른 공간들을 굽어보게 된다.


정고재의 평면은 아파트지만 입면은 한옥이라고 생각해요. ‘바람이 드나들면 창이고 사람이 드나들면 문이다’라는 말에는 창과 문의 경계가 모호한 한옥의 구성미가 담겨 있거든요. 정고재를 한옥의 경험적 감성을 따르는 집으로 꾸린 제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성도 창과 문이 주는 다채로운 결이에요.


안방은 부부가 특별하게 여기는 장소다. 짙은 갈색의 목재 양개문, 캔버스로 치면 100호쯤 되는 크기의 창을 낸 가벽, 긴 복도, 오동나무 반닫이까지. 한옥에서 안채는 귀하고 중요한 공간인 만큼 정고재의 안방 역시 한옥의 안채와 같이 귀한 공간이 되길 바라며 공을 들였다. 침대 외에 이렇다 할 가구를 두지 않을 만큼 단출하게 꾸렸지만, 항상 정갈하고 반듯하게 정리해 둔다. 양개문을 열고 마주하는 오동나무 반닫이는 최정선이 자신의 평생 반려 가구로 마련한 것.


지금은 잊힌 전통이지만 옛날엔 자녀가 태어나면 아들은 소나무, 딸은 오동나무를 심어서 이들이 성인이 되어 혼례할 때 그 나무로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어 살림 밑천으로 주었다고 해요. 저도 친정엄마가 결혼할 때 혼수로 오동나무 가구를 해주셨어요. 간소하게 전통을 지키며 의미를 두고 싶었죠.


그런가 하면 서재에선 신우택이 다섯 살 때부터 쓰던 나무 수납장이 존재감을 빛낸다. 결혼과 동시에 버려질 뻔한 것을 둘이 이고 지고 데려왔다. 계속 가지고 살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아빠의 오래된 가구라며 보여줄 셈이다. “옛것은 가늠할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을 보여주는 흔적이라 생각해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옛 가구는 저희에게 소중한 보물이죠.” 모든 일상의 중심은 거실이다. 거실에선 아르떼미데의 톨로메오 메가 플로어 램프, 달 착륙선 아폴로11호를 모티프로 디자인한 디자이너 노먼 포스터의 노모스 테이블, 바실리 체어처럼 근현대의 아이코닉한 디자인이 장독과 개다리소반이 이루는 토속적인 분위기 사이에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도잠의 모듈러 테이블로 쌓아 만든 선반에는 최정선이 헌책방을 수소문해 구한 최순우 전집이 놓여 있다.


도잠의 모듈러 테이블로 쌓아 만든 선반에는 최정선이 헌책방을 수소문해 구한 최순우 전집이 놓여 있다.


오래된 것과 최신의 것을 섞으며 적당한 균형을 두려고 했어요. 우리 기준에 정고재와 잘 맞는 것들로 선택하면서도 상징적인 디자인을 골랐죠. 모든 가구는 두 사람의 사는 모습과 일상이 서로 너무 차단되거나 간섭하지 않도록 배치했고요.

부엌과 안방에 가벽을 세우고 마련한 큰 창 너머로 너울너울 보이는 다른 공간.


부엌과 안방에 가벽을 세우고 마련한 큰 창 너머로 너울너울 보이는 다른 공간.


나지막한 산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여름밤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집 안으로 가만가만 들어온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여름날 정고재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 출근하는 평일이든, 집에 온종일 머무는 주말이든 아침에 눈뜨면 곧장 창을 여는데, 집 안에 새 공기가 넘실거리는 느낌이 들면 부부는 왠지 모를 안도감마저 느낀다. 이름처럼 정갈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꾸린 집은 여러 해를 묵어 은근하고 점잖거나, 행주질을 많이 받아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장독의 얼굴을 닮았다.

창을 낸 곳에 가벽을 세워 만든 작은 서재와 거실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개다리소반.


창을 낸 곳에 가벽을 세워 만든 작은 서재와 거실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개다리소반.


올해 7월이면 이곳에 산 지 3년이 돼요. 남동쪽으로 모든 창이 난 집의 아침은 눈부시게 찬란해요. 살기 전엔 남동향 집의 아침 기세를 알지 못했는데, 거실 창으로 쏟아지는 동틀 무렵의 햇빛은 거의 스물여섯 자(약 8m)가 넘는 깊이까지 들어와 집 안 곳곳에 내려앉아요.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재택 근무를 했던 시국에는 아무리 늦잠을 자고 싶어도 햇살 덕에 잠을 잘 수 없었죠.

창을 낸 곳에 가벽을 세워 만든 작은 서재와 거실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개다리소반.


창을 낸 곳에 가벽을 세워 만든 작은 서재와 거실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개다리소반.


엔데믹 시대가 열린 요즘의 아침은 사뭇 다르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기 전, 곳곳을 살피는 짧은 시간 동안 둘은 집으로부터 하루 치 응원을 몰아서 받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매일 그렇게 두 사람의 윤택한 하루가 시작된다.

한옥의 창과 문이 주는 경험적 감성을 담았다.


한옥의 창과 문이 주는 경험적 감성을 담았다.





글 이경진 사진 표기식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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