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만 1년 차, 아직도 출근 중입니다

번아웃만 1년 차, 아직도 출근 중입니다

ㅍㅍㅅㅅ 2021-11-26 04:34:13

이걸 혼자 다한다고?!

입사 후 첫 달 동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 한 명이 이렇게 많은 일을 담당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전임자는 퇴사하는 날 자정까지 야근을 했다. 후임자인 내게 업무를 인수인계할 시간은 이틀이나 있었지만, 이틀 중 내가 실제 인수인계를 받은 시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못했다. 그는 밀린 일을 해치우고 가느라 내게 업무를 설명해줄 시간조차 내지 못했다.

마지막 날 거의 퇴근 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그의 자리에서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엉망인 자기 자리를 치우다 갑자기 울컥했는지 혼잣말을 읊조렸다. “나도 몰라 이제. 인수인계도 엉망으로 하고 갈 거야.” 인수인계를 기다리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무례함에 놀랐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혼잣말은 여전히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뒤에 한 가지 생각이 추가되었다. 나도 곧 분노의 퇴사를 하며 후임자 앞에서 저런 말을 뱉어버릴 것만 같다. 무섭다. 입을 조심해야겠다…….

 

번아웃 1년 차, 잿가루가 되었지만 출근함

‘번아웃’은 사람이 지치고 소진되었을 때 나타나는 어떤 증상 혹은 상태를 뜻합니다. […] 지금 상황이 나아지거나 최소한 끝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경우나 지금 하는 일에 통제감을 느끼는 경우라면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버틸 만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이 없고, 일을 하는데 통제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한다고 느끼면 번아웃이 옵니다.

  • - 안주연,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창비, 2020, pp. 15–16.

작년 11월 신간을 하나 구매했다. 책의 앞부분만 읽어도 이미 내가 번아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입사 9개월 차에 벌써 번아웃이라고 확신하려니 좀 성급한 것 같았다(그건 그냥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또 번아웃이라고 한들, 나보다 더 격무에 시달리는 직속 상사 앞에서 내가 번아웃이오 말할 용기가 없었다. 다만 이런 책을 읽었는데 이러저러한 증상이 번아웃 증후군이더라고요 여러분도 번아웃 조심하세요 하는 말을 지나가듯이 꺼냈을 뿐이다.

번아웃과 함께 온 증상들은 신체적, 감정적, 정신적으로 정말 다양하다. 우선 나에게 감정적으로 나타난 반응을 열거하자면 이렇다.

  • - 소진, 분노, 짜증, 분통, 냉소, 탈진, 탈영혼, 증오, 혐오

지금은 어떠냐고? 냉소주의와 정신을 집에 두고 출근하는 텅 빈 시체 상태를 거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감정들에 대해 말하자면

인력에 비해 업무가 산더미 같지만 인력 충원은 안 하는 회사에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천수관음 마냥 내 에너지와 자원을 다 갈아 넣어 버텼다. 그리고 연말 즈음, 신년 업무보고 자료에 1인당 하나씩 “신규사업”까지 만들어 오라는 말에 처음으로 엄청난 분노가 일었다. 뭐랄까, 분통이 터져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사 10개월째의 일이다.

진짜 뭐 어쩌라는 거야?

그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켰어야 하는 걸까? 나는 일단 “기존에 있던 사업을 확장해서 신규 사업인 것처럼 보고하면서 최대한 품이 ‘덜’ 들어가는 일로 만들자”는 상사의 회유에 넘어가 여러 최악 중 차악을 선택했다. 하지만 품이 ‘덜’ 들어간다는 것이지 ‘안’ 들어간다고는 안 했다. 이미 천수관음인데 여기서 1g도 더 힘을 낼 팔은 없었다.

천수관음의 HP는 이미 0이야

분노를 간직한 채 고비를 지나며 해가 넘어갔다. 올해 초부터는 하나하나의 업무를 모두 버티는 기분으로 해왔다. ‘이것’만 끝나면, 다시 ‘이것’만 끝나면, 또다시 ‘이것’만 끝나면…의 연쇄로 나를 속이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하지만 ‘이것만 끝나서’ 쉴 수 있는 때는 오지 않았다.

평범하게 어리숙한 다른 신입사원들처럼 나는 잘 속았다. 나의 상사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에게 부풀려진 가짜 희망을 심어주었다. 회사가 인력 충원을 안 해주어 우리가 일시적으로 고생하는 중이니 한 명만 더 들어오면 모든 게 해소될 것처럼 말할 때, 나는 정말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다 소시오패스 같은 보스가 우리 부서에 오고 나선 그 보스만 다른 곳으로 가면 다 수월해질 거라는 낙관을, 나는 또 믿었다. 나에게 이런 근거 없이 부풀려진 희망을 말한 상사도 실은 자기 자신에게 들려줄 희망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젠 모든 게 헛된 낙관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인력 문제? 신규 인력을 달라고 요구할 때는 보고서를 써야 했고(업무가 추가됐네요) 그 보고서에는 새로운 사람이 오면 시작할 신규 사업계획을 잔뜩 넣어야 했다(인력과 업무가 같이 추가됩니다). 신규 사업 없이 인력 충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고로 누가 와도 나의 업무를 나눠서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현재 인원 대비 업무가 과중하다는 실무자의 외침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인성이 파탄 난 보스? 물론 그 자체로 너무나 많은 고통을 유발했지만, 냉정하게 봤을 땐 저 사람이 떠난다고 해서 해결될 고통이 아닌 것도 이미 잔뜩 널려있었다. 사실 저 파탄 난 인성의 소유자를 걸러내지 못하고 리더 역할을 계속해서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조직의 실패를 의미했다.

나의 상사와 나는 그냥 원인으로 한 가지만이 있다고 믿고 싶었을 뿐, 사실 괴로움의 원인이 너무나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괴롭지 않고 이 직장을 다닐 방법은 없었다.

이미 하얗게 불태웠어…

올해부터 나는 몹시 냉담한 상태가 되었다. 내가 맡은 직무,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 내가 듣는 말,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에 마음이 차갑게 식은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올해 8월부터는 아예 정신을 잃은 것 같다. 무슨 일을 하고 지나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회사 업무뿐 아니라 개인적인 시간도 어떻게 썼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니 자꾸 11월이라고는 하는데 체감상 9월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어 갑자기 생활비를 펑펑 쓰고, 배달음식만 먹고, 충동구매를 하고, 그렇게 좀 충동 조절이 안 되는 생활을 한다.

 

중독과 셀프 고문에 대해 말하자면

감정적인 것 외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나타난 번아웃의 징후들은 이런 게 있다.

  • - 신체적 증상: 만성피로, 무기력, 불면증, 식도염, 위염, (악화한) 과민대장증후군
  • - 정신적 문제: 핸드폰 중독

분노, 혐오감 같은 감정적 반응도 그렇겠지만, 특히 신체적 증상과 정신적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정신적인 것이 곧 행동으로 연결되고, 그 행동의 결과가 다시 신체적인 증상을 악화하기도 한다. 그냥 서로 잘 얽혀 있어서 악순환의 바퀴를 가열 차게 굴리며 셀프 고문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특히 나에게 있어서 중독과 불면은 서로의 강력한 결과이자 원인이고 뭐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한 덩어리로 취급된다.

과도한 습관성 행동도 번아웃 증상에 해당합니다. 과도한 습관성 행동이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예컨대 SNS를 하루 5시간씩 붙잡고 있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보상심리로 폭식이나 폭음을 하게 되고, 과도하게 흡연을 할 수도 있죠. 인터넷 서핑, 게임, 온라인 쇼핑 등에 집착하기도 하는데, 이런 습관성 행동의 문제는 피로를 본질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 - 앞의 책, p.76.

피로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증상으로 무기력이 있습니다. 퇴근 후에 집에서 뭘 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누워만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무기력증이 심하면 모임이나 약속에 부정적이 됩니다. 혼자서 운동하거나 취미를 즐기거나 산책하기 어렵고,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을 시도하는 건 더 힘들고요. 이런 증상이 지속되면 에너지가 정말 바닥나서 방전된 상태라는 표시입니다.

  • - 앞의 책, p.78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내게 잠을 안 자는 고문을 가한 지는 아주 오래오래 되었다. 작년부터도 아마 그러고 살았던 것 같다. 보통은 잠을 안 자고 SNS와 유튜브와 핸드폰 게임을 전전하다가 새벽 5시쯤이 되어서야 잠들어 겨우 1–2시간만 눈을 붙이고 출근하는 식이다.

어느 날은 씻지도 않고, 불도 환하게 켜놓고, 침대에 누워 ‘씻어야 되는데…’ 하는 죄책감만 되뇌며 아침까지 유튜브를 시청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아침이 되어 씻고 출근한 날도 있다. 또 어떤 날은 저녁을 차려 먹을 기운이 없어서 잠깐 쉬기로 하고 핸드폰에 빠져 새벽 1시까지 굶기도 했다.

출처: Invajy

처음 시작은 일단 보상심리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면 내일 또 출근인데 그렇게는 잠들고 싶지 않은 마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자야 하는데 벌써 너무 늦어버렸다는 부채감에 시달리며 동시에 그 부채감을 잊기 위해 다음 추천 동영상을 누르고 피드를 새로고침 한다.

내가 만난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요즘 유튜브 중독이라며 1시간씩 유튜브를 봤다고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유튜브를 심하게 보았다’의 기준이 5시간쯤은 되기에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곤 한다. 5시간 동안 뭘 보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른다. 왜 누워서 유튜브만 켜면 시간이 혼자 5시간 가버리는 걸까. 대충 강아지 영상 몇 개, 드라마 영상 몇 개, 예능 몇 토막 봤던 것 같은데…

당연한 소리지만, 밤을 새우고 출근하면 너무너무 피곤하다. 아무리 회사라도 인간의 정신력엔 한계가 있다. 더 쉽게 짜증이 나고 졸리고 몸은 처지고 괴롭다. 근데 그 피곤함마저 나에게 주는 벌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니 습관처럼 셀프 고문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날 괴롭힌 건 회사인데 왜 내가 나한테 복수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괴로움이 괴로움을 더하며 수렁에 빠져 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글이나마 적을 수 있는 건

지난 한 달 정도 야근 없이 퇴근하고 또 사이사이 휴가를 쓰면서 정신을 돌려놓을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기간 야근을 안 한 건 입사 이후 처음이다. 번아웃의 수레바퀴가 최고 속력을 낼 땐 에세이는커녕 조금이라도 잠을 자는 게 더 나은 선택이다. 이런 소강상태가 끝나고 11월부터 다시 일이 잔뜩 떨어질 기미가 보이는데 나는 어쩌려고 그러는지 내 건강과 내 호주머니 사정을 저울질한다. (너, 퇴사할 수 있어? 모르겠다.)

번아웃이 오고도 1년째 출근 중이라는 말을 제목에 써놓고 보니 아직 잿가루까지는 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 만다. 그래도 엊그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린다. 넌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서 찰랑거리는 상태라, 어느 날 갑자기 퇴사하더라도 꽉 찬 항아리가 넘쳤다고 생각할 뿐 놀라지 않을 거라고.

몇 달 전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화장실을 갔는데 거울 속에 동태 눈깔을 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다 타서 이미 잿가루가 되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출근은 계속된다. 텅 빈 시체가 되어 출근하는 방법만이 지금의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라, 흐릿한 동태눈으로 일단 출근은 해본다. 찰랑거리는 항아리가 되어.

 

추신

번아웃으로 고생 중인 분이라면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를 추천합니다. 당장의 외부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도, 몸과 마음을 돌보고 긴장을 풀 수 있는 팁이 있습니다.

원문: 상사를때리면안되는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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