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여름의 빵을 추억하며, 빵집의 한여름

지나간 여름의 빵을 추억하며, 빵집의 한여름

ㅍㅍㅅㅅ 2021-10-14 13:06:02 신고

지금 감자가 맛있을 땐데 빵에 좀 넣어봐.

매일 아침 들르는 단골손님께서 들릴 듯 말 듯 말씀하셨다. 순간 아차 싶었다. 여름과 감자. 아아! 여름이지 참.

나의 지난 브런치 글을 유심히 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여름은 그야말로 글 대목이다. 여름 글 맛집이라고 자부할 정도인데 하마터면 올해는 그냥 넘어갈 뻔했다. 사실 몇 해 전 여름부터는 무더위로 푹 퍼져서는 배달 음식만 먹어댔다. 먹을 게 지천이라 손 바쁜 여름이 어쩐 일로 잠잠해진 것 같아 서글프다는 그해 고백은 현실이 되었다.

올해는 더했다. 빵집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 시작된 일상은 여름이 되어서야 겨우 적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폭염으로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반죽을 떼어 뭉치고 돌아서면 부풀고, 이전과 같은 양의 물을 넣어도 끓는 온도에 반죽이 축축 처졌기 때문이다. 레시피를 조금씩 수정해야 했고 작업 순서 변경이 불가피했다.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도 거대한 오븐의 열기를 이기진 못했다. 아직 여름을 입지 못한 두꺼운 작업복 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사이 토마토는 영글고 감자는 단단해졌으며 옥수수는 알알이 맺혔다. 푸성귀는 더 푸릇해지고 바질 향도 진해졌다.

손님이 가게를 떠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길로 근처 생협에서 하지(여름) 감자와 가장 많이 보이는 방울토마토를 사서 돌아왔다. 그새를 못 참고 방울토마토 하나를 꺼내 앙 베어 물었다. 짭조름하고 달았다. 껍질은 단단했고 맛이 진했다. 방울토마토는 오븐에서 낮은 온도로 오래 말리기로 했다. 이것이 날린 수분만큼 달콤하고 짭찌름한 맛이 농축된 ‘선드라이드 토마토’다.

볕이 아니므로 정확히는 ‘오븐 드라이드 토마토’겠지만.

게다가 토마토는 수분이 많아서 빵 반죽에 그대로 들어가면 반죽을 헤칠 수 있기 때문에 말리는 건 여러모로 당연한 선택이다. 감자는 아주 얇게 썰었다. 이대로 오븐 열이 닿으면 은은한 감자 향이 맛이 강한 방울토마토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뭘까, 뭐지. 바로 그때 앞집 서점 사장님이 준 바질이 생각났다. 이거다. 화룡점정 비장의 무기가!

서점 사장님은 여름부자다.

감자와 토마토 그리고 바질. 듣기만 해도 완벽한 여름 조합이다. 그렇게 한여름을 듬뿍 얹은 빵이 탄생했다. 꾸덕해진 방울토마토를 보니 지난여름 내내 해 먹던 오일 절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여름을 그득그득 담은 일명 ‘한여름병’도 진열대 한 편에 자리했다.

애초 빵집을 구상할 때부터 계절이 있는 빵집을 꾸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사실 다른 음식과는 달리 빵에 계절을 담긴 어렵다. 주재료인 밀가루만큼 더 들어가는 것이 계절과는 거리가 먼 버터, 달걀, 설탕, 우유 등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새는 제철 과일이나 밤, 쌀, 등의 곡물을 이용한 빵이 시중에 많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1년 내내 볼 수 있는 빵이 대부분이다. 엄밀히 계절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오픈 당시만 해도 나의 욕심으론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설탕, 버터, 우유, 달걀을 넣지 않는 빵을 만들고, 부재료를 많이 넣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밀과 그 풍미에 집중하는 빵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건과나 견과류, 곡물을 넣어 반죽에 어울리는 재료로 다양한 맛을 낸다.

여기에 한 가지 정도는 계절에 맞게 만들고 싶었다. 이를테면 가을엔 곡식, 여름엔 과채, 봄엔 나물 등을 말이다. 손님들도 밋밋한 빵보단 담백하면서 풍성한 맛을 좋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한여름 시리즈.

사실 이런 부재료 말고도 ‘제철 빵’이라는 것이 있긴 하다. 빵의 주재료를 생각하면 쉽다. 생각할 것도 없이 밀가루다. 밀은 한여름에 수확한다. 따지자면 빵의 제철은 여름인 셈이다. 우리에겐 아직 생경한 ‘햇밀’이 그것이다. 대개 우리밀이나 수입밀은 각지에서 수확한 밀을 한 군데에 모아 제분해, 포대에 담긴 것이 1년 내내 쓰인다. 나는 기성 우리밀과 유기농밀을 섞어 쓴다. 수입 유기농밀을 섞어 쓰는 건 우리밀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제빵력 때문이다.

신념을 내세워 우리밀만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빵이 무거워지고 산미가 강해져서 손님의 선택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자영업이 처음인 나는 거듭 고민 끝에 이를 장기적인 목표로 삼기로 했다. 물론 지금도 일부 빵에 지역에서 토종 밀 등을 직접 제분하는 일명 ‘농가밀’을 쓰긴 하지만 아직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

빵의 제철을 고민하면서 토마토, 감자, 바질을 빵에 넣은 건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이 무겁다. 이 햇밀을 마음껏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햇밀을 잘 사용하려면 해마다 밀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토마토가 매일, 매해 다른 것처럼 밀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레시피만 몇 번을 바꿔야 한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집은 양이 많지 않고, 농가밀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축적한 데이터가 부족해 아직 농가 밀을 쓰긴 엄두가 안 난다. 틈틈이 써보고는 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다. 이 때문에 당분간 기성밀을 사용하고 다양한 농가밀을 사용하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자고 스스로 타협한 부분이다. 물론 시기가 더 앞당겨질 수도 있겠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현재 햇밀에 대한 연구와 여러 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도시장터인 마르쉐@는 해마다 이 햇밀을 다루는 워크숍과 장을 마련하는데 올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병행된다고 한다. 햇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나로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2020년 마르쉐@혜화 ‘햇밀장’. / 출처: 마르쉐@

빵집에서 처음 맞는 한여름이 완벽하진 않아도 분명 고무적이긴 하다. 비록 나는 느끼지 못한 여름을 우리 집에 다녀간 손님들은 충분히 만끽한 듯싶다. 한여름을 단 빵과 병을 사간 손님들이 인스타그램 댓글이나 메시지로 이런저런 후기를 남겨주었다. 마치 한여름을 통째로 먹는 것 같다고도 했고, 아이스크림보다 시원해서(?) 입안이 얼얼하다는 재치 있는 후기도 있었다. 토마토가 이렇게 빵과 잘 어울리는 건지 처음 알았다는, 빵쟁이로서 뿌듯한 말씀도 해주셨다.

계절을 식탁에서 접한다는 나의 고집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렇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빵에 담아보려고 한다. 계속해서 햇밀에 대한 고민과 연구는 제철인 여름을 지나도 겨울, 또 다음 해 봄에도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그간 내가 경험으로 쌓은 가치를 빵에 담는 방식이다.

손님들의 반응을 찬찬히 읽는데 문득, 내게도 여름이 밀려왔다. 오븐 앞에서 그 누구보다 더운 여름을 보내면서 정작 여름을 느끼지 못한 신세가 야속했지만, 올해는 이만하면 되지 싶었다. 그 어느 해보다 특별한 여름을 즐겼으니 말이다.

원문: 오가닉씨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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