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45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캠퍼스 P5 건설현장에는 이미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이름과 혈액형이 적힌 안전모를 쓴 작업자들이 오전 5시 작업을 앞두고 삼삼오오 현장으로 향했다. P5 입구에 자리 잡은 간이 분식 포장마차와 커피 판매대도 일찌감치 문을 열었다. 작업자들은 김밥이나 어묵으로 배를 채우고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6개월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황모씨(60)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는 게 아직도 힘들다”며 “요즘처럼 더운 날에도 걸어서 현장까지 들어간다”고 말했다.
1년가량 P5 현장에서 일한 40대 박모씨는 “한번 들어가면 오랫동안 일을 해야 해 출근 전에 든든하게 먹는다”며 “요즘은 워낙 더워 몸 상태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메모리 수요 확대에 대응해 P5 건설을 서두르면서 평택캠퍼스의 시계도 빨라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당초 2030년께로 예상됐던 P5 가동 시점을 2028년으로 앞당겨 차세대 메모리 생산능력을 조기에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AI 반도체는 1년 사이에도 새로운 세대가 나온다. 반면 반도체 공장은 착공에서 장비 반입, 공정 안정화, 양산까지 수년이 걸린다. 수요가 확인된 뒤 움직여서는 이미 늦을 수 있다는 얘기다.
P5 현장의 이른 새벽은 삼성전자가 앞당긴 ‘2년’을 따라잡기 위한 움직임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 가운데 하나는 P4와 P5 사이에 건설 중인 대형 오버브릿지다.
길이는 약 360m다.
사람이 오가는 연결통로가 아니다. 반도체 웨이퍼가 공정에 따라 P4와 P5 사이를 오가기 위한 전용 통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현재 건설 중인 구조물은 P4와 P5를 연결해 웨이퍼를 이동시키기 위한 오버브릿지”라며 “사람이 오가는 통로가 아니며 평택캠퍼스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시설”이라고 설명했다.
길이는 삼성전자 화성캠퍼스에 설치된 약 120m 규모 오버브릿지의 세 배에 달한다.
반도체 생산은 웨이퍼 한 장이 수많은 장비와 공정을 거치며 완성되는 과정이다. 특정 공정을 마친 웨이퍼가 다음 장비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지체되면 생산효율이 떨어진다.
결국 웨이퍼를 필요한 공정으로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옮기느냐가 팹의 생산성과 직결된다.
P4와 P5를 오버브릿지로 연결하면 두 공장을 따로 운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정 상황에 따라 웨이퍼를 서로 오가게 하면서 하나의 생산체계처럼 활용할 수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P4와 P5에서 각각 수행할 수 있는 공정에 따라 웨이퍼가 중간중간 오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택캠퍼스 전체 면적은 약 289만㎡다. 축구장 약 400개를 합친 규모로 P1부터 P4, P5 FAB1·FAB2까지 모두 6개의 팹을 수용할 수 있다.
평택캠퍼스의 역사는 10여년 전 시작됐다.
삼성전자는 2015년 5월 15조6000억원 규모의 초기 투자계획을 바탕으로 첫 번째 평택공장을 착공했다. 이후 투자가 확대되면서 최종 투자액은 약 30조원까지 늘었다.
2017년 7월 4세대 64단 V낸드 양산을 시작했고, 2018년에는 두 번째 생산라인 건설에 들어갔다. 2020년부터는 첨단 D램 생산도 시작했다.
이후 평택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핵심 생산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P5는 그동안의 평택 투자보다 규모가 더 크다.
정부 자료 등에 따르면 P5 구축에는 전체 단계에 걸쳐 60조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P5를 HBM을 비롯한 차세대 메모리 생산의 핵심 거점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물산에서 P5 건설을 총괄하는 관계자는 “P5는 규모와 복잡성 측면에서 과거 수행했던 프로젝트와 다르다”며 “단순히 공기를 맞춰 건물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품질과 생산성을 확보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평택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크레인과 건설장비는 국내 설비투자 지표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올해 2분기 국내 설비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13% 증가했고 기계류 투자는 15% 늘었다. 6월만 보면 설비투자는 21.7%, 기계류는 22.2% 증가했다. 반도체 제조용 장비 투자가 증가세를 이끌었다.
P5는 AI가 국내 반도체 투자를 얼마나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장이다.
SK하이닉스도 생산시설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첫 번째 팹의 공정률이 70%를 넘어선 가운데 두 번째 용인 팹인 Y2에 35조2000억원, 청주 M17에 19조1000억원을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두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만 54조3000억원이다. SK하이닉스 자기자본 120조7000억원의 약 45%에 해당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동시에 대규모 생산시설 투자에 나서는 배경에는 AI 산업과 반도체 제조업 사이의 시간차가 있다.
AI 가속기는 1년 안에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지만 반도체 팹은 건설부터 장비 반입, 공정 안정화와 양산까지 수년이 걸린다.
수요가 확실해진 뒤 생산능력을 늘리기 시작하면 이미 시장 대응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이에 따라 양사의 경쟁도 단순히 더 좋은 메모리를 먼저 개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 수요를 내다보고 생산능력을 얼마나 먼저 확보하느냐의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사무국장은 “투자를 하면 제조시설과 생산 규모가 늘고 이를 통해 시장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며 “경쟁사는 투자하는데 자신이 투자하지 않으면 결국 시장 주도권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P5 하나만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 구도가 크게 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두 회사 모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만큼 앞으로는 투자 규모 자체보다 새로 확보한 생산능력을 얼마나 빠르게 제품과 매출로 연결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반도체 업체들이 투자를 서두르는 또 다른 이유는 AI발 메모리 호황의 범위가 빠르게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AI 메모리 시장은 HBM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SK하이닉스가 시장을 선점했고 삼성전자는 HBM4 등 차세대 제품을 앞세워 추격하고 있다.
최근에는 AI 수요가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로도 확산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HBM과 서버용 고부가 제품의 생산 비중을 높이면서 범용 D램 공급 여력이 줄어드는 가운데 AI 서버가 대량의 D램을 소비하면서 수급 부담이 커지고 있다.
낸드도 AI 시스템에서 생성되는 대규모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한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수요 증가로 업황이 개선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시그마인텔은 올해 세계 반도체 매출이 약 1조5900억 달러에 달하고 이 가운데 메모리가 약 6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D램 매출은 300% 이상, 낸드는 약 250% 증가하고 HBM 시장은 1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옴디아도 올해 반도체 시장 성장률 전망치를 94.1%로 높이고 HBM과 첨단 패키징, 선단공정의 병목 현상이 2027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전체 메모리 매출에서 서버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37%에서 올해 56%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조사기관마다 시장 정의와 집계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AI 수요가 HBM을 넘어 D램과 낸드까지 함께 끌어올리고 있다는 방향은 같다.
삼성전자는 2분기 세계 D램 시장에서 매출 기준 39%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의 D램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 틈을 타 중국 CXMT와 대만 난야 등 후발업체들도 생산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기존 메모리 3사가 HBM과 서버용 고부가 제품에 생산능력을 집중하는 사이 범용 메모리 시장을 파고드는 모습이다.
AI가 메모리 산업의 전통적인 사이클을 없앤 것은 아니다.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오르면 투자가 늘고, 늘어난 생산능력이 다시 공급 증가와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는 메모리 산업의 특성은 여전하다.
다만 AI 시대에는 수요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데 따른 대가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P5 건설현장에서는 수천명의 작업자가 구조물과 전기설비, 배관을 설치하고 장비 주변 공간을 정비하고 있다.
퇴근길에 만난 한 여성 작업자 박씨는 현장 인원을 묻자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작업자도 “현장이 굉장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장비 주변 칸막이를 설치하는 하청업체 직원 김모씨는 “우리는 주변 장비가 2나노 공정인지 3나노 공정인지까지는 잘 모른다”며 “다만 장비가 굉장히 비싸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항상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입장에서는 결국 건설현장”이라며 “맡은 일을 제대로 하면서 장비를 건드리거나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현장은 삼성전자가 사업장을 운영하고 삼성물산이 주요 건설공사를 총괄하는 가운데 1차 협력사와 재하청업체, 전문 공사업체 등이 각각 맡은 공정을 수행하는 구조다.
이 같은 다단계 구조는 폭염으로 작업이 중단될 때 작업자들이 받는 영향에도 차이를 만든다.
삼성 반도체 사업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한 현장 반장은 “우리처럼 1차 협력업체에 속하면 하루 작업을 못 해도 다른 날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며 “재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 일을 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곧 소득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올여름 P5 건설현장의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는 폭염이다.
삼성물산은 체감온도가 35도에 이르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고위험 작업을 중단하고, 38도가 넘으면 옥외 작업 등 폭염에 취약한 작업을 금지하고 있다.
안전을 위한 조치지만 작업자 입장에서는 오전 일찍 일을 시작해도 불과 몇 시간 만에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날이 생긴다. 특히 일당을 중심으로 임금을 받는 일부 작업자에게는 작업 중단이 곧 소득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장에서는 온열질환도 발생하고 있다.
한 작업자는 “어제만 해도 온열질환으로 5명이 쓰러져 구급차가 계속 오갔다”고 말했다.
기상당국이 발표하는 기온보다 실제 건설현장에서 작업자가 느끼는 열기는 훨씬 더 심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 설명이다.
최용상 이화여대 기후·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기상당국의 기온은 기본적으로 개방되고 통풍이 잘되는 조건에서 측정한 배경 대기온도”라며 “실제 작업현장의 체감 환경은 이보다 훨씬 가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름철 아스팔트 표면온도는 60도를 넘어설 수 있고, 달궈진 콘크리트 구조물과 통풍이 어려운 공간도 작업자의 열 노출을 키운다. 긴 작업복과 안전모, 밀집된 작업환경까지 겹치면 작업자가 받는 열 스트레스는 더 커진다.
최 교수는 “외부 기온 자체를 낮출 수는 없다”며 “결국 작업자의 노출과 취약성을 줄이는 방식으로 열 스트레스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폭염을 피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작업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하루 시작도 새벽으로 당겨졌다.
P4와 P5 사이에서는 웨이퍼가 오갈 360m 오버브릿지가 점차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그 아래로 크레인과 공사 차량이 움직이고, 수천명의 작업자가 각자의 공정으로 향한다.
AI가 앞당긴 것은 P5의 가동 일정만이 아니다.
건설현장의 하루도 함께 빨라졌다.
다음 날 새벽 3시45분, P5 건설현장의 불은 다시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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