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하는 모습을 공개한 뒤 기내식 운반 차량을 이용해 다른 군용기로 몰래 이동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당시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탄 에어포스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탑승한 것처럼 움직이며 사실상 미끼 역할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기사와 사건과 직접적 연관은 없음을 알립니다.) / 백악관 공식 홈페이지
워싱턴포스트(WP)는 10일(현지 시각) 미국 정부 관계자와 비행 기록 등을 토대로 지난달 8일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동 경로를 감추기 위한 작전이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미 정보당국은 이란이 트럼프 대통령이나 그가 이용할 항공기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했고 신빙성이 있는 위협으로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에어포스원 탄 척…기내식 차량으로 C-32A 이동
트럼프 대통령이 앙카라 방문 때 이용했던 카타르 기증 보잉 747-8 전용기는 먼저 공항을 떠났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존 대통령 전용기인 VC-25A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들도 같은 항공기에 탑승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 비행기를 타고 튀르키예를 떠나지 않았다. 탑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을 비롯한 일부 참모들과 함께 취재진에게 보이지 않는 반대편 출입문으로 이동했다.
해당 출입문에는 기내식과 물품을 옮길 때 사용하는 케이터링 차량이 붙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 일행은 차량의 적재 공간으로 옮겨 탄 뒤 지상으로 내려갔고 차량은 인근에 대기하던 미 공군 C-32A 수송기로 이동했다.
당시 촬영된 영상에는 케이터링 차량이 잠시 카메라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C-32A 옆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담겼다. 적재함은 유압식 장치를 이용해 C-32A 출입문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수행 인력은 이 과정에서 C-32A로 옮겨 탄 것으로 파악됐다.
헤그세스 장관은 별도의 외부 계단을 이용해 C-32A에 탑승했다. 해당 항공기가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구형 에어포스원에 탄 기자들은 트럼프 대통령도 함께 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일부 백악관 참모도 이 비행기에 남았다. 기자들에게는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라는 지시까지 내려졌다.
대통령이 타지 않은 구형 전용기는 영국으로 이동하면서 대통령 전용기를 뜻하는 ‘에어포스원’ 호출부호를 사용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탑승한 C-32A는 ‘리치 18(Reach 18·RCH18)’이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했고 비행 과정에서 항공기 위치를 외부에서 추적하기도 어렵게 했다.
C-32A는 보잉 757-200을 기반으로 만든 미 공군의 주요 인사 수송기다. 미국 대통령이 공군 항공기에 탑승하면 원칙적으로 해당 항공기의 호출부호는 에어포스원이 된다.
영국 도착 뒤 또 갈아타…실제 이동 경로 끝까지 숨겨
트럼프 대통령이 탄 C-32A와 기자단이 탑승한 구형 전용기 등은 이후 영국 밀든홀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지에서도 자신의 이동 경로가 노출되지 않도록 움직였다.
그는 C-32A에서 내린 뒤 구형 전용기로 이동한 다음 평소처럼 계단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 장병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는 카타르가 기증한 신형 전용기로 다시 갈아타고 미국 워싱턴으로 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앙카라를 떠나기 전 자신이 타고 온 신형 전용기 대신 기존 전용기를 이용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당시에는 신형 항공기를 영국 주둔 미군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존 전용기를 선택한 것처럼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이동 과정에서는 이란의 위협에 대비해 여러 항공기를 동원한 기만 작전이 진행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카타르가 미국에 기증한 보잉 747-8은 약 4억달러 규모의 항공기로 대통령 전용기로 사용하기 위한 개조 작업을 거쳤다. 다만 기존 대통령 전용기가 갖춘 일부 방어·대응 장비가 충분하지 않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보안 문제가 제기됐다.
이란 위협 첩보에 기만 작전…백악관은 세부 설명 피해
이번 작전이 진행될 당시 미국과 이란의 긴장도 고조된 상태였다. 양측의 협상이 결렬된 뒤 미군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란에 대한 군사 공격을 재개하면서 대통령 신변과 전용기를 겨냥한 공격 가능성이 제기됐다.
미 당국은 당시 확보한 위협 정보가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해 트럼프 대통령의 실제 탑승 항공기를 숨기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출입기자단과 떨어져 비밀리에 이동하는 일은 드물다. 과거에도 대통령이 위험 지역을 방문할 때 여러 항공기를 이용해 실제 탑승기를 감춘 사례는 있었지만 대통령이 타지 않은 항공기를 대통령이 탑승한 것처럼 운항한 이번 방식은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백악관과 미 비밀경호국은 대통령을 겨냥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보호 조치를 취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작전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자신을 겨냥한 이란의 위협을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이란의 제거 대상 가운데 최우선 순위에 올라 있다는 취지로 말하며 대통령을 겨냥한 공격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만 아니었다…미 대통령들이 ‘비밀 이동’ 택했던 순간들
미국 대통령이 안보를 이유로 이동 경로나 탑승 항공기를 숨긴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0년 3월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하면서 실제 탑승기를 감추는 방식을 사용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인도 뭄바이에서 공식 환송 행사를 마친 뒤 인근에 대기하던 표시 없는 소형 걸프스트림 항공기로 이동했다. 파키스탄에는 미국 정부 표식이 있는 항공기가 먼저 착륙했고 대통령과 외모가 비슷한 비밀경호국 요원이 내렸다. 클린턴 대통령이 탄 항공기는 그 뒤 별도로 착륙했다.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도 2003년 11월 추수감사절에 이라크 바그다드를 비밀리에 방문했다.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평범한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 뒤 에어포스원에 탑승했다. 방문 계획은 극소수에게만 공유됐고 작전 과정에서도 보안 유지가 요구됐다. 에어포스원은 바그다드 접근 과정에서 대통령 탑승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운항했고 동행 기자들에게는 착륙할 때 창문을 열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부시 대통령은 현지 미군 장병들과 추수감사절 식사를 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2012년 5월 아프가니스탄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극소수 취재진만 동행했고 출발 전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 전자기기를 맡기는 보안 조치가 적용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바그람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하미드 카르자이 당시 아프가니스탄 대통령과 전략적 동반자 협정에 서명했다.
조 바이든 당시 대통령도 2023년 2월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비공개로 찾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새벽에 백악관을 출발해 C-32 항공기로 유럽으로 이동한 뒤 폴란드에서 열차를 타고 우크라이나에 들어갔다. 동행 취재진은 2명으로 제한됐고 휴대전화도 이동 중 회수됐다. 미국은 충돌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 사실을 러시아 측에 사전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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