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비로소 투명한 수면 위로 고갤 내밀고 숨을 몰아쉰다.”
▲시 한 편
<섬망> - 천수호
손가락이 무얼 더듬는다 기억의 어디에 닿을까 거부하는 것과 거부당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문에 이걸 꽂을 곳은 어디인가 거기 한 겹이 또 있었군 뚫리지 않은 허공을 증명하기 위해 아직 골목에 서 있다 어디에 꼬옥 맞는 집이 있을까 다정하게 들어가서 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 숱한 골목들이 손을 잡아끌지만 만질 수 없는 작은 방, 구름이 걸리고 바람이 걸리고 지는 꽃이 걸리고 산보다 더 멀리 있는 뿌연 황홀이 걸리는 좁은 입구, 주소도 없고 두드릴 문짝도 없는 열쇠를 들고 밤과 낮을 지나 태아와 소녀를 지나 좁은 블라인드 틈을 지나 유리에 부딪치는 허망한 소원을 지나 계속 허공을 휘젓고만 있다 빈터에는 소리가 닿지 않은 풀이 자잘한 꽃들을 피우고 꽃보다 이름이 더 깊이 숨은 풀의 운명을 아무도 연구하는 자가 없다 그래도 바짝 말랐다가도 물을 주면 다시 주둥이가 살아 움직이는 열쇠
▲시평
여기, 더듬거리는 사람이 있다. 골목에서, 대문 앞에서, 방문 앞에서…. 그의 손에 열쇠 하나가 들려 있다. 왜 여기 서 있는지,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잠시 멍해진다. 섬망 상태처럼 느껴진다. 열쇠 구멍을 찾을 때마다 손이 허공을 헤맨다. 문이 열쇠를 거부하는 기분이다. 작은 방에 들어가기까지 여러 겹의 관문을 통과하는 듯하다. 어찌어찌 방에 들어왔지만,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때 이곳은 나에게 “꼬옥 맞는 집”이었다. 다정한 사람의 곁에 누우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늘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 자리에 다시 누워본다. 작은 창문으로 구름과 바람, 지는 꽃이 보인다. 한때 다정한 사람과 누워서 보던 익숙한 풍경이다. 이제는 “산보다 더 멀리” 떠난 사람이 그립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황홀한 순간의 기억에 눈이 흐려진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찾아올 수도 없는, 찾아와도 다정하게 문 열고 맞아줄 사람도 없다. 기억은 시간순으로 저장되지 않지만, 과거로 갔다가 큰 물줄기만 되짚어 온다. 봉인되었던 기억이 폭발하듯 흘러나온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환각을 불러온다. “태아와 소녀를 지나” “허망한 소원”으로. 슬픔은 인간의 몫이지만, 죽음은 인간의 의지 밖에 있다. 절대 되돌릴 수 없다. 투명한 유리는 밖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풍경 너머까지 바라볼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듯하지만, 절대 건너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단절을 유리라는 사물을 통해 시각화한다. “계속 허공을 휘젓고만 있다”는 문장에는 작은 방의 주인이었던,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응축되어 있다. 손을 뻗어 붙잡아보려 하지만, 그곳은 아무런 저항도, 촉감도 없는 허공일 뿐이다. 죽은 사람은 자연히 이름이 잊힌다. 그를 기억하던 사람마저 죽으면 “더 깊이 숨은 풀의 운명”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슬픈 와중에도 그것이 안타깝다. “주둥이가 살아 움직이는 열쇠”는 시인과 동일시된다. 시인은 작은 방에 살다가 경계를 넘은 사람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