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만 가자."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처세술을 조기 이수한 우리는 영혼 없는 끄덕임과 '모르는 척'으로 무장한 생존의 고수들이다. 퇴근길 소주 한 잔에 "오늘도 버텼다"며 스스로를 마취하고, "받은 만큼만 일한다"며 핏대 세우는 걸 훈장처럼 여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공했다는 이들의 삶은 왜 우리와 이토록 딴판일까. 어쩌면 우린 그저 거대한 '펜듈럼(Pendulum)'의 진동판 위에서 시키는 대로 춤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공력을 낭비하며 '잉여 포텐셜'을 공급하는 건전지 신세로 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 교과서 대신, 왜 이 지겨운 장면이 무한 반복되는지 그 메커니즘이 궁금했다. 내게 그 프리즘을 빌려준 바딤 젤란드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의 '트랜서핑' 이론을 메스 삼아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김현우의 핫스팟]을 시작한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중력이랑 싸우는 것도 모자라, 아예 시간의 목을 조르려고 해요." 강남의 잘나가는 피부과 원장에게 들은 소리다. 이마에 주름 하나 생기면 득달같이 보톡스를 맞고, 볼살이 조금만 꺼져도 필러를 빵빵하게 채워 넣는다고 한다. 근육을 마비시켜 세월의 흔적을 다리미질하듯 쫙쫙 펴버리는 마법. 덕분에 우리는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매끈한 깐달걀 피부를 얻었지만, 대신 부작용도 하나 덤으로 챙겼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고 찡그려도 찡그린 게 아닌, 표정 잃은 얼굴을 마주하게 된 거다. 얼굴에 훈장처럼 새겨져야 할 희로애락의 역사를 주사 한 방으로 날려버린 대가다.
가만 보면 우리네 도시 개발이나 공간 소비 방식도 보톡스 강박증을 닮았다.
조금만 낡아 보이면 가차 없이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번쩍이는 유리 궁전을 욱여넣는다. 글로벌 트렌드니 최신 유행이니 하는 이름의 마취제를 듬뿍 놔가면서 말이다. 한데 이 요란하고 번잡한 서울 한복판에서, 무려 128년 동안 단 한 번의 '도시 보톡스'도 맞지 않고 제 얼굴의 주름을 온전히 간직한 채 살아남은 기막힌 노장이 하나 있다.
명동성당이다.
오래된 벽돌 건물을 러시아의 양자물리학자 바딤 젤란드가 주창한 '트랜서핑(Transurfing)'의 돋보기로 들여다보자. 명동성당이 128년의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비결은 자신을 둘러싼 숱한 '파동'들이 제풀에 지쳐 쓱 지나가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128년, 깐달걀들은 모르는 '주름살'의 스펙
명동대성당은 1883년 토지 매입을 시작으로 1892년에 첫 삽을 떴고, 청일전쟁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15년 만인 1898년에 완공됐다.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 매캐한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민주화 시대를 거쳐, 탕후루 꼬치와 K팝 댄스가 난무하는 2026년의 글로벌 관광도시 서울까지. 완전히 다른 세상들이 하나의 건물 앞을 스쳐 지나갔다.
2026년 지금, 명동의 풍경은 얼마나 변했나. 서울시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 기준 명동의 외국인 관광객 일평균 유동 인구는 10만910명. 명동 전체를 누비는 인구 중 무려 47.1%가 푸른 눈이거나 이국적인 억양을 쓰는 외국인이다. 물론 명동성당 자체에 외국인이 몇 명이나 들어가는지 공식 통계로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성당 앞마당은 미사보를 쓴 신자들과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다국적 관광객이 묘하게 뒤섞인 하이브리드 공간이 됐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도대체 도시는 왜 다 허물어가는 옛날 건물을 굳이 남겨둬야 하는가"
1898년에 성당을 찾은 갓 쓴 선비와, 1987년에 성당으로 피신한 넥타이 부대, 그리고 2026년에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리는 일본인 관광객이 같은 장소를 전혀 다른 목적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치가 숨어 있다.
펜듈럼(Pendulum)과 맞짱 뜨지 않는 '축'의 미학
트랜서핑의 핵심 개념인 '펜듈럼(Pendulum, 집단적 사념체)'을 소환할 차례다. 트랜서핑에서 펜듈럼은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모여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집단적 흐름을 말한다.
명동성당 주변을 128년짜리 타임랩스로 돌려보자. 그동안 얼마나 많은 펜듈럼이 명동을 휩쓸고 지나갔나. △왕조가 무너지는 소리 △총독부의 서슬 퍼런 칼바람 △군사정권의 군화 발소리 △거리를 뒤덮은 민주화의 함성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던 금융·상업의 욕망 △그리고 지금의 K-컬처라는 글로벌 파도까지.
펜듈럼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시대의 간판은 수십 번 바뀌었지만, 붉은 벽돌의 명동성당은 그대로 남았다. 성당이 펜듈럼에 올라타지 않고, 기꺼이 하나의 축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됐다고 해서 명동성당이 간판을 민주화 기념관으로 바꿔 달지 않았다. 2026년에 외국인이 몰려온다고 해서 제단에 K팝 체험관을 차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꿋꿋하게, 그저 성당일 뿐이다.
자신의 본질(중심)을 고수했기에 시대가 바뀔 때마다 그 위에 새로운 의미가 나이테처럼 덧입혀졌다. 신앙에서 시작해 근대 건축, 시민사회, 민주화, 그리고 글로벌 서울의 상징까지. 밀푀유 케이크처럼 층층이 맛을 쌓아 올린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희소자원, "시간이 만든 진입장벽"
트랜서핑에는 과잉 중요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목을 매고 중요성을 부여할수록, 오히려 반발력이 생겨 그 목표가 어그러진다는 논리다.
이를 도시 공간에 대입해보면 "무조건 최신식이어야 해!", "이번 시대 유행에 완벽하게 맞춰야 해!"라는 강박(과잉 중요성)에 빠진 도시는 계속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삽질을 무한 반복한다.
* 1980년 최고의 명물 빌딩.
* 2000년 최고의 복합 쇼핑몰.
* 2020년 최고의 스마트 빌딩.
당장 지어놨을 땐 삐까뻔쩍한 최신이지만, 유행이라는 펜듈럼이 지나가는 순간 그 건물은 가장 구질구질한 구식으로 전락한다. 유행 따위엔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 명동성당은 역설적으로 모든 시대를 관통해버렸다.
경제학적으로 번역하면 시간이 만들어낸 진입장벽이다. 2026년에 굴지의 대기업이 명동 한복판에 1000억원을 쏟아부어 입이 떡 벌어지는 고딕 양식 건축물을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입구에 "128년의 역사가 숨 쉬는 명소"라는 팻말은 달 수 없다. 128년이라는 스펙은 실제로 128년을 버텨내야만 얻을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건물이 주는 사회적 이익은 보존이라는 나이브한 단어 하나로 퉁칠 수 없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교과서 수십 페이지로 외우는 것보다, "여기서 사람들이 이렇게 모였어"라며 붉은 벽돌 앞을 걸어보는 순간, 납작했던 역사는 3D 공간을 얻고 우리의 뇌리에 꽂힌다.
유행이 될 것인가, 역사가 될 것인가
만약 1960년대 어느 날, "명동 땅값이 얼만데 이런 낡은 건물을 둬!"라며 명동성당에 기어코 도시 보톡스를 놔버렸다면 어땠을까. 그 자리에 번듯한 주차장이나 백화점이 들어섰다면, 트랜서핑에서 말하는 대안공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1898년과 2026년을 이어주던 유일한 웜홀(통로) 하나를 영영 잃어버렸을 것이다.
과거의 건축물을 남기는 건 미래의 후손들이 과거를 다각도로 해석하고 즐길 수 있는 선택권을 보장해주는 고도의 투자 행위다.
명동성당 주위를 타임랩스로 돌리면 배경은 미친 듯이 깜빡거리며 바뀐다. 전차가 다니고, 교복 입은 학생들이 뛰어가고, 최루탄 연기가 피어오르다, 어느새 인스타그램 릴스를 찍는 외국인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화면 정중앙의 붉은 벽돌 건물은 미동도 없다.
세상의 파동(유행)을 억지로 멈추려 들거나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그 파동이 거세게 지나가도 끄떡없을 중심을 만드는 것. 명동성당이 2026년의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촌철살인이다.
고집과 중심은 다르다. 고집이 융통성 없이 변화를 거부하는 꼰대짓이라면, 중심은 폭풍 같은 변화 속에서도 무엇을 바꾸지 않을지를 정확히 아는 혜안이다. 펜듈럼을 쫓아가면 가벼운 유행이 되고, 수많은 펜듈럼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묵묵히 버티면 묵직한 역사가 된다.
명동성당의 자산은 128년 동안 단 한 번도 주름살을 펴지 않고 버텨낸, 끊어지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도시는 이 매력적인 주름살 덕분에 오늘도 조금 더 깊어지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우 기자
hyunoo9372@seoulmedia.co.kr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
Copyright ⓒ 여성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