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는 기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보이지 않던 기회를 먼저 감지하고, 그 기회를 현실의 구조로 바꾸는 존재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가격과 정보의 틈에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을 끌어낸다. 한 시대의 산업은 그들의 '발견' 위에서 움직이고, 문명의 방향은 그들의 '판단'에서 갈린다. 여성경제신문이 유튜브 채널 기업가정신연구소와 공동으로 기획한 [초격차 기업가] 연재는 기업을 문명의 작동 원리로 바라본다. 이스라엘 커즈너가 말한 기업가는 '기회에 대한 경계(alertness)'를 가진 존재다. 이미 존재하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불균형을 먼저 인식하고, 그 틈을 메우며 시장을 움직인다. 질서는 계획이 아니라 발견에서 시작된다는 통찰이다. [초격차 기업가]에서 다루는 인물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국경을 초월한다. 기술 격차, 제도 제약, 정치적 압력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연결을 읽어내고, 조직과 자본, 기술로 고정시킨 사람들이다. 문명은 거대한 설계도가 아니라 수많은 발견의 축적이다. 기업가는 그 발견을 가장 먼저 실행으로 옮기는 존재다. 이 연재는 그들을 보이지 않던 질서를 포착하고 현실로 끌어낸 '문명의 별'로 기록하려는 시도다. [편집자주] |
1987년 중국 선전. 개혁·개방의 열기가 막 번지기 시작한 도시 한구석에서 작은 통신 장비 회사가 문을 열었다. 창업에 참여한 6명이 각자 2만1000위안씩 모아 세운 회사였다. 총 자본금은 5600달러. 자본도 기술도 변변치 않은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이름은 화웨이(华为).
창업 초기 이 회사가 하던 일은 기술 개발이 아니었다. 홍콩에서 사설 전화교환기(PBX)를 들여와 중국 기업·기관에 판매하는 유통 사업에 가까웠다. 훗날 이 회사가 세계 통신 기술 질서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는 빠르게 팽창했다. 기업과 기관이 늘어나면서 통신 인프라 수요도 폭발적으로 커졌지만 그 인프라를 채우는 것의 대부분은 외산 장비였다. 가격과 공급은 물론 기술 경쟁력에서도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구조였다. 화웨이 내부에서는 수입·유통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통신 장비를 개발해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회사는 선전 바오안현 외곽 허름한 공업대빌딩 3층을 임대해 연구 공간을 마련했다. 프로그램 제어 방식 디지털 교환기 개발에 착수했다. 자본도 인맥도 브랜드도 없는 민간 기술자가 자체 개발 영역에 뛰어드는 선택은 무모해 보였다.
당시 50여 명의 젊은 직원들이 연구개발에 뛰어들었다. 환경은 열악했고 미래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이 선택은 회사의 방향을 바꿨다. 1992년 화웨이는 매출 1억 위안을 돌파했고 2000년 매출은 220억 위안으로 뛰었다. 8년 만에 220배 성장이다. 통신 네트워크 장비를 중심으로 IT 솔루션, 전자제품, 클라우드, 자동차 전장, 반도체, 인공지능(AI)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그렇게 화웨이는 연간 매출 8600억 위안을 웃도는 세계적인 통신 기업으로 성장해 전 세계 170여 개 국가와 지역에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화웨이의 이러한 성장 중심에는 창업자 런정페이(任正非)가 있었다.
인민해방군·배관공·기술자 거쳐
마흔셋 늦깎이 나이에 화웨이를 세우다
런정페이는 전형적인 창업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회사를 세울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43세로 일반적으로 25~35세가 창업 적기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무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결정은 늦은 창업이라기보다 시대를 관통해 온 경험의 결과에 가까웠다.
런정페이는 1944년 10월 25일 구이저우성 전닝현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런모쉰(任摹勋)은 시골 학교 교장, 어머니 청위안자오(程远昭)는 선임 교사였다. 런정페이는 7남매 중 장남이었다.
그는 학업 성적이 매우 우수했지만 정상적인 교육 환경을 누리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중국 전역이 대기근에 빠졌기 때문이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대기근 시절 가족은 굶주림과 직접 맞부딪쳤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던 시절이었지만 7남매는 모두 목숨을 건졌다. 런정페이는 훗날 그 이유로 어머니의 철저한 식량 관리를 꼽았다. 그의 어머니는 식량과 물을 마지막 한 모금까지 일곱 남매에게 공평하게 나눠줬다고 회고했다.
어린 런정페이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쌀겨와 야채를 섞어 몰래 먹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제지당한 적도 있었다. 가오카오(高考·중국 대학 입시)를 앞두고는 어머니가 매일 아침 옥수수빵 한 개를 그에게만 따로 챙겨줬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없는 몫이었다.
1963년 충칭건축공정학원에 합격해 집을 떠나는 날에는 어머니가 손수 만든 흰 셔츠 두 벌과 홑이불 한 장을 건넸다. 그 홑이불은 대학 4년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7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한 소년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대학 시절 당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이 이론과 책에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고 지식인이 노동자·농민과 분리되는 현상을 '부르주아적 경향'으로 보았다. 이 문제의식은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다. 그해 5월 대학에는 수업 중단 공고가 붙었다.
문화대혁명은 그의 가족도 비껴가지 않았다. 아버지 런모쉰이 국민당 시절 412 군수공장에서 근무한 경력 때문에 '자본주의 노선자(走资派)'로 지목돼 비판 투쟁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무렵 런정페이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버지가 비판 투쟁에 끌려 나갔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곧바로 기차에 올랐다. 홍위병들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고향으로 향했다.
그가 아버지를 찾았을 때, 아버지는 덤덤하고 짧게 한 마디를 남겼다. "지식은 중요하다. 그것을 가족을 돕는 데 써라." 런정페이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컴퓨터와 외국어 3개를 독학으로 익혔다. 그는 훗날 "문화대혁명은 국가에는 재앙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인생의 세례였다. 정치적으로 성숙해졌고 더 이상 책벌레가 아니게 됐다"고 회고했다.
어머니의 옥수수빵 한 개와 아버지의 가르침은 이후 인민해방군(PLA) 복무 시절의 연구개발 경험과 1987년 화웨이 창업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기반이 됐다.
1968년 가을, 스물네 살 런정페이는 충칭건축공정학원 졸업장을 들고 인민해방군(PLA) 인프라공정병단 31파견대 304대대로 배치됐다. 임무는 구이저우성 안순(安顺)의 011기지 항공기 공장 건설이었다. 자기 전공인 건축공학을 살린 자리였지만 정치 환경상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어중간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정치적 표적이 됐던 그는 홍위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중국공산당(CCP) 당원도 아니었다. 군에서도 처음 2년은 요리와 잡무를 맡았고 그다음은 배관공이었다. 전자공학은 야간에 혼자 책을 펴고 독학으로 익혔다.
1974년, 서른 살이 된 그는 PLA 22파견대로 옮겨져 랴오닝성 랴오양(辽阳)으로 향했다. 임무는 화학섬유 공장 건설로 목적은 단순했다. 중국 인민에게 옷을 입히는 것. 당시 중국은 1인당 1003분의 1m만 배급됐고 그 천으로는 헌 옷에 헝겊을 덧대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런정페이 본인도 훗날 "어렸을 때 헝겊을 덧대지 않은 옷을 입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동북지방의 혹한 속에서 그는 4년간 공장을 지었다. 기계 시험 도구를 역설계해 낸 성과로 비로소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1978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3월, 그는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과학대회 초청장을 받았다. 6000여명의 참석자 중 35세 미만은 150여명이었고 런정페이의 당시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군 대표단 중 거의 유일한 비당원이었던 그는 이 자리에서 시대의 전환을 목격했다.
단상에 오른 덩샤오핑은 "과학자도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다. 손으로 일하든 머리로 일하든 모든 사회주의 노동자다"고 선언했다. 이 발언은 상징적이었다. 과학자와 기술자가 더 이상 탄압의 대상이 아닌 체제의 주체로 재정의된 순간이었다. 런정페이처럼 체제 안팎을 떠돌던 어중간한 기술자들이 비로소 자기 자리를 얻는 신호기도 했다. 1982년 그는 중국공산당 12차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됐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안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3월, 덩샤오핑이 군 현대화 방침의 일환으로 대규모 감축을 선언하면서 인프라공정병단 전체가 해산됐다. 12년 군 생활이 한순간에 끝났고 그는 서른아홉에 다시 무직 상태로 돌아왔다. 이후 4년간 정유·전자업계를 전전하며 이혼까지 겪는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선전시 과학기술국의 한 간부가 창업을 권유해 왔다. 개혁·개방의 최전선이던 선전에서의 제안이었다. 평생 한 번도 안정된 출발선에 서본 적 없는 사람이 마흔셋에 처음으로 자기 이름의 회사를 세우는 일을 결심한다. 1987년 9월 15일이었다.
12년의 군 생활은 그의 경영 철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조직, 규율, 시스템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형성됐으며 화웨이의 조직 문화는 이 경험에서 출발했다. 창업 초기부터 자체 기술 개발에 집착하고 단기 성과보다 전체 구조의 지속성을 우선하며 비어 있는 영역을 먼저 선택한다는 판단. 이 방식은 이후 위기 국면마다 반복되는 화웨이의 대응 방식이 됐다.
호황 속에서 꺼낸 한마디
"화웨이의 겨울을 먼저 준비하라"
2000년 11월, 화웨이가 매출 220억 위안을 기록한 호황기. 런정페이는 사내에 한 편의 글을 직접 써서 돌렸다. 제목은 '화웨이의 겨울(华为的冬天)'. 그가 호황 한복판에서 직원들에게 말한 것은 '위기'였다.
"화웨이는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장 중일 뿐이다. 겨울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한 줄을 덧붙였다. "비판은 물론, 그 비판에 대한 비판까지 하라."
'비판과 자기비판'은 본래 마오쩌둥 시대 PLA 정풍운동의 핵심 절차였다. 정치학습 시간에 자기를 돌아보고 동료를 평가하는 자리, 12년 군 생활에서 런정페이가 몸으로 익힌 방식이다. 그는 그 방식을 기업 문화로 이식했다.
비판은 누구나 한다. 시장도, 언론도, 경쟁사도. 그런데 그 비판이 정확한지, 그 비판이 우리를 진짜 약점으로 데려가는지, 아니면 비판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지까지 다시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자기 진단의 진단. 외부 평가를 받되 그 평가의 좌표 자체를 다시 보는 작업이다. "올바른 가정이 있어야 올바른 사상이 나온다. 그 사상이 방향과 전략을 만든다"고 그는 말했다.
이 표현이 사내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그 직후였다. 2001년 닷컴 버블이 꺼졌고 2002년 화웨이는 창사 이래 첫 매출 감소를 겪었다. 호황기에 겨울을 가정했던 말이 1년 만에 사실이 된 것이다. 그 뒤로 '겨울'은 화웨이 사내 언어로 정착했다.
화웨이의 진짜 '겨울'은 2003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국 시스코(Cisco)는 화웨이가 라우터 운영체제 소스코드 일부를 복제했다며 텍사스 동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화웨이가 글로벌 시장에서 처음으로 기술 정당성과 지식재산권 문제를 놓고 미국 법정의 검증대에 오른 사건이었다.
1년 9개월간의 법적 공방 끝에 양사는 2004년 7월 합의에 도달했다. 화웨이는 일부 라우터 소프트웨어를 수정해 재출시하기로 했고 시스코는 추가 청구를 철회했다. 시장의 평가는 엇갈렸다. 한편에서는 "화웨이가 시스코를 상대로 살아남았다"는 평가가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시장에서 화웨이에 대한 신뢰에 의문이 제기된 출발점"이라는 해석도 뒤따랐다.
2010년대 들어 화웨이가 글로벌 통신 장비 1위로 올라서면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미 의회는 2012년부터 화웨이 장비에 중국 인민해방군(PLA)과 중국 정보기관의 백도어가 심겨 있을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보고했다. 미 국가안보국(NSA)도 같은 기조였다. 영국 MI6, 호주, 캐나다 정보 당국도 5G 인프라에 화웨이 장비 사용을 차단하는 움직임에 동참했다.
의혹의 핵심 근거 중 하나로 반복적으로 거론된 것은 런정페이 본인의 이력이었다. PLA 12년 근무에 마지막 직책은 부단장(부연대장급), 1982년에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된 이력이 문제로 삼아졌다.
런정페이는 일관되게 반박했다. 2015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그는 "PLA 복무는 우연이었다. 1980년대 군 감축으로 제대했고 생계를 위해 창업했을 뿐이다"고 말했다. 화웨이는 자사가 100% 직원 소유 회사이며 국가 자본이 0이라고 강조해 왔다. 회사 지분은 '직원 주식 소유 위원회'가 99%를 보유하고 런정페이 본인은 약 1%만 가진 구조다. 다만 이 지분 구조 자체가 충분히 투명하지 않다는 비판도 서구 학계·언론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의혹은 결국 단정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화웨이 장비에서 백도어가 실제로 발견됐다는 공식 증거는 미 정부도 공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이 화웨이에 가한 압박의 강도는 민간 기업 한 곳을 대상으로 했다고 보기엔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의혹의 입증 여부와 별개로 그 의혹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화웨이가 어떤 지정학적 좌표에 서 있는지를 드러낸 셈이다.
'화웨이의 겨울'은 그렇게 사내 언어로 남았다. 그러나 호황기에 써낸 그 한 줄이 실제 시험대에 오른 것은 따로 있었다. 2019년,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하면서부터다. <하> 편에서 계속. 하>
☞ PBX(사설 전화교환기) = 기업이나 기관 내부에서 사용하는 전화 교환 시스템으로, 외부 통신망과 연결해 통화를 관리하는 장비다. 초기 화웨이는 해당 장비를 수입·판매하는 유통 사업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 화웨이의 겨울(华为的冬天) = 2000년 11월 런정페이가 사내에 직접 써 돌린 글의 제목. 매출 220억 위안 호황기에 위기를 가정하라는 메시지를 담았고 화웨이 사내 문화 언어로 정착했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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