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산업이 인공지능(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중국 메모리 업체의 추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핵심 인력의 이직 과정에서 영업비밀이 해외로 넘어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기술보호 체계에 대한 재점검이 요구되고 있다.
10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최근 서울고법 형사10-1부는 중국 반도체 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SK하이닉스의 영업비밀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전 직원 김 모씨에게 1심과 같은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김 씨는 SK하이닉스 중국 현지법인에서 근무하면서 CIS(CMOS Image Sensor) 관련 자료를 사내 시스템에서 출력하거나 촬영했고, 일부 내용을 중국 기업에 제출할 이력서에 활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판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법원이 단순한 자료 반출 자체보다 영업비밀을 실제 이직 과정에서 활용했다는 점을 무겁게 봤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해당 자료가 피해 기업이 장기간 상당한 자원을 투입해 확보한 성과라는 점을 고려해, 이 같은 행위를 가볍게 처벌할 경우 해외 경쟁사가 인력 영입을 통해 국내 기업의 기술을 손쉽게 확보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했고 유출 자료 상당수가 회수된 점은 형량을 정하는 과정에서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됐다.
다만 이번 사건에서 함께 거론된 하이브리드 본딩 관련 자료에 대해서는 다른 판단이 내려졌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해당 자료가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고시상 첨단기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관련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기술적으로 중요하다는 평가와 법률상 '국가핵심기술' 또는 '첨단기술'로 보호되는 범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게 업계 해석이다.
현재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국가핵심기술 가운데 반도체 분야는 11개다. 여기에는 30나노급 이하 D램의 설계·공정·소자 및 3차원 적층 기술, D램 적층조립 및 검사 기술, 64단 이상 3D 낸드 기술, 1㎛ 이하 이미지센서 기술, 첨단 패키지 조립·검사 기술 등이 포함된다. 기술의 중요성이 높아질수록 보호 필요성도 커지지만, 모든 기업의 영업비밀과 연구자료를 국가핵심기술과 동일한 수준으로 보호할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도 있다.
문제는 기술유출이 특정 기업의 보안 문제를 넘어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 등에 따르면 2025년 적발된 기술유출 사건은 모두 179건으로 전년보다 45.5% 증가했다. 이 가운데 해외 유출 사건은 33건이었으며 중국으로 향한 사건이 18건으로 54.5%를 차지했다. 해외 유출 기술 가운데서는 반도체가 5건으로 가장 많았다.
국가정보원이 공개한 사례에서도 반도체 기술의 해외 유출은 반복되고 있다. 2025년에는 반도체 증착장비 설계도면을 해외 경쟁사로 가져간 사건에서 주범에게 1심 징역 7년, 2심 징역 6년이 선고됐고, 협력업체 직원들에게도 실형이 선고됐다. 2024년에는 국내 반도체 기업의 해외 주재원이 국가핵심기술 자료를 빼낸 뒤 경쟁사 이직을 시도한 사례도 적발됐다.
특히 최근에는 반도체 기술유출 문제가 중국 메모리 업체의 성장과 맞물려 더욱 민감해지고 있다. 2025년 말 검찰은 삼성전자 전직 임원과 엔지니어 등 10명을 중국 메모리 업체 CXMT에 D램 제조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삼성전자가 약 1조600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공정기술 등이 유출됐으며, 해당 기술이 CXMT의 10나노급 D램 생산 기반을 마련하는 데 활용됐다고 판단했다. 로이터는 이 사건을 중국의 HBM 개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례로 전했다.
올해 4월에는 이 사건과 관련해 삼성전자 전직 연구원에게 징역 7년이 선고됐다. 법원은 유출된 자료가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으며, 검찰은 피고인이 중국 업체로부터 장기간 금전적 보상을 받은 것으로 파악했다.
이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 배경에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투자 확대와 인력 확보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 최대 메모리 업체 가운데 하나인 CXMT는 올해 대규모 기업공개를 통해 자금을 확보한 데 이어 베이징에 추가 D램 생산시설을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3사가 세계 D램 시장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 업체의 생산능력 확대가 계속되면 시장구조가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중국 업체의 경쟁력이 한국 기업과 동일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아직 어렵다. KB증권은 CXMT의 상장이 오히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기존 3사의 기술력과 고객 기반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고성능 서버용 D램 시장에서 단기간에 경쟁구도를 흔들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추격 속도 자체를 과소평가하기도 어렵다. 중국 업체들은 한국 기업이 상대적으로 비중을 줄인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최근에는 CXMT가 중국 내 서버업체와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등 고객 기반을 확대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각종 시장조사업체 등에선 중국 메모리 업체들의 시장 점유율 확대가 확인되고 있으며, 기술격차가 과거보다 좁혀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기술유출의 경제적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한 세대 뒤처진 공정기술이나 장비 설계도가 유출되는 것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AI 반도체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HBM 적층, 패키징, 열관리, 검사 등 여러 공정의 세부 노하우가 경쟁력의 일부가 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기술보호 수준을 높이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핵심 인력의 이직을 지나치게 제한하면 인재 이동을 통한 산업 생태계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어서다. 반대로 퇴직자가 자신이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세부 내용을 이력서나 면접 과정에서 활용하는 관행을 방치할 경우 영업비밀 보호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 이에 직무별 접근권한 관리, 퇴직 전후 자료 점검, 문서 출력·촬영 기록 관리, 경쟁사 이직 시 보안교육 등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 나온다.
정부 차원에서도 보호 대상의 범위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이번 SK하이닉스 사건에서 하이브리드 본딩 관련 자료가 법률상 첨단기술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것은 기술의 경제적 중요성과 법적 보호 범위 사이에 간극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핵심기술 지정 범위를 무조건 확대하기보다는 기술 발전 속도에 맞춰 보호 대상과 판단 기준을 주기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반도체 기술 경쟁은 앞으로도 인력과 자본, 장비, 특허, 공급망을 동시에 둘러싼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중국 업체들이 자체 장비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는 것도 변수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기술을 얼마나 빨리 개발하느냐뿐 아니라 개발한 기술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호하고 다음 세대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SK하이닉스가 최근 2031년까지 54조3000억원을 투자해 용인과 청주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확대하기로 한 것도 AI 메모리를 둘러싼 경쟁이 생산능력과 기술개발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핵심 기술을 개발한 인력이 정당한 보상을 받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동시에, 퇴직 과정에서 기업의 영업비밀이 외부로 넘어가지 않도록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병행돼야 한다"며 "기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인력 이동과 기술보호 사이의 경계를 더욱 정교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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