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항 규칙과 관련해 오만과 양해각서의 전체적인 틀에 합의하면서 실질적인 협상 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다만 이란은 미국에 전쟁 피해 배상과 제재 해제, 동결 자산 해제 등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같은 시기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 파키스탄이 메카에서 집단방위협정을 체결하면서 중동 안보 질서가 미국 중심의 기존 체제에서 다극화된 구조로 재편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란 의회 국가안보외교정책위원회 대변인 하산 카슈카위는 현지시간 7일 이란과 오만이 호르무즈 해협 통항에 관한 양해각서의 전체 틀을 확정했으며, 최종 문안과 세부 내용은 조만간 공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알자지라는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현재 고위급의 최종 승인만 남은 상태라고 보도했다. 아바스 아라흐치 이란 외무장관도 8일 “항로 문제, 특히 통항 선로 확정에 상당히 근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라흐치 장관은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은 미국의 임시 협정 위반에 대한 보상 등 다른 조건의 충족 여부에 달려 있다”며 미국의 추가 조치를 요구했다.
오만 외무부도 8일 성명을 통해 호르무즈 해협 통항 협상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한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확인했다. 다만 이미 이뤄진 협상 성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자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무함마드 무흐비 대변인은 같은 날 아바스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리적 요인이 수십 년 동안 군사적 계산에서 제외됐지만, 이제 전쟁의 중심으로 강력하게 돌아왔다”며 호르무즈 해협이 이란의 중요한 “전력 투사 수단”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란은 미국이 임시 협정을 위반했다며 상당한 수준의 추가 조건을 제시했다.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는 성명을 통해 미국이 군사적 위협을 중단하고 이란과 역내 동맹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영구적으로 종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이란 항구에 대한 해상 봉쇄 해제와 미군 철수, 전쟁 피해 배상, 경제 제재 해제 및 해외 동결 자산 반환도 요구했다. 최종 협상을 위한 60일의 시한이 약 1주일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협상 기한이 연장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이란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시에 군사적 압박도 병행하고 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8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미국은 현재 이란과 대화하고 있으며, 미국과 이란의 충돌은 초기 단계를 지나 중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교·경제·군사적 수단을 종합적으로 활용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 미국의 가장 큰 관심사로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최대한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운송하는 것”을 꼽았다. 이란이 장기적으로 태도를 바꿀 의지가 있는지를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같은 날 브래드 쿠퍼 미군 중부사령부 사령관은 이스라엘을 방문해 에얄 자미르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등 고위 지휘부와 만나 다전선 안보 정세를 평가했다.
이스라엘 공영방송 칸은 미군이 수십 대의 공중급유기와 전투기, 방공 시스템 및 수천 명의 병력을 이스라엘에 배치한 채 높은 수준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군 중부사령부는 8일 이란에 대한 해상 봉쇄를 엄격하게 시행하는 한편, 상선의 우회 운항과 선박 검색, 인도주의 구호선의 통과 허용 등을 병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란과의 전투가 장기화하면서 미국의 무기 재고도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의 패트리엇 방공미사일 재고가 1,700발 아래로 떨어졌다고 8일 보도했다.
이는 이란과의 전투에서 1,500발 이상을 사용한 결과로 전해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군수업체들과 생산 확대 방안을 협의하고 있지만, 소진된 물량을 보충하는 데에는 2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으로부터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을 매월 공급받는 방안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필요한 물량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밝혔다.
이러한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 파키스탄 정상은 7일 메카에서 ‘메카 공동방위협정’에 서명했다. 협정 체결식에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가 참석했다.
협정에는 세 나라 가운데 어느 한 국가에 대한 무력 공격을 3개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집단방위 조항이 포함됐다.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집단방위 원칙을 규정한 제5조와 유사한 내용이다.
파키스탄 외무부와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SPA통신은 공동성명을 통해 이번 협정이 “공동 억제력을 강화하고 지역과 세계의 평화·안보·안정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번 협정이 군사동맹이나 종교적 연대체를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며, 특정 국가를 겨냥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터키 역시 이번 협정이 기존 NATO 회원국으로서의 의무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걸프뉴스는 이 협정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과 이란을 둘러싼 분쟁 이후 걸프 국가들이 미국의 안보 우산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분석했다.
후티 반군의 사우디아라비아 남부 나즈란 공격 등 역내 안보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역 국가들이 독자적인 안보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는 것이다.
알자지라는 이번 협정이 단순한 정치적 선언에 머물지, 실질적인 안보 체제로 발전할지는 회원국 가운데 한 나라가 실제로 공격받는 상황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동 안보 질서는 미국의 단일한 안보 우산에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이란·오만의 호르무즈 해협 협상과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집단방위체제,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 등 여러 축이 공존하는 형태로 재편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 협상의 최종 성패와 메카 공동방위협정의 실효성이 향후 중동의 새로운 세력 균형을 결정할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이창우 기자 cwlee@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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