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빈 더봄] 마지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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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빈 더봄] 마지막 기록

여성경제신문 2026-08-09 10:00:00 신고

나는 매일 이 골목을 바라봐.
내가 보는 게 뭐 대단한 건 아냐. 그냥 평범한 것들이지.
아침이면 출근하는 사람들과 학교 가는 아이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한낮에는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 
상자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택배기사들,
그리고 밤이 되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저씨들···.
나는 이 동네 주민들을 십삼 년 동안 보아왔어. 골목 끝, 같은 자리에서.

얼마 전, 이 동네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어. 여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와 갓난아기가 있는 젊은 부부였지.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맞은편에 그들 집의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난 잘 볼 수 있었어. 처음엔 그냥 평범한 가족 같았지. 

다른 가족들과 좀 다른 게 눈에 들어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 여자아이가 속옷만 입고 베란다에 나와 한참 있다 들어갈 때가 많았거든. 어떨 때는 밤새 베란다에 웅크리고 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들어갈 때도 있었지. 사람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다니던 때였는데 말이야.
아이의 몸에는 푸르스름한 자국들이 보였어. 자국들은 점점 늘어갔지. 밤이면 거실 불이 오래 켜져 있었고, 창문 너머로 그림자가 크게 움직였어. 그런 밤이면 나는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어. 먼지 때문인지 밤이슬 때문인지는 모르겠어. 

AI로 생성한 이미지임 /챗GPT
AI로 생성한 이미지임 /챗GPT

그 아이가 내 눈에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더 열심히 아이를 바라보았어. 내가 보는 것들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이젠 오래돼서 눈이 침침하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아이를 바라봤어.

어느 날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왔어. 그들은 내 몸을 뒤져 무언가를 꺼내 갔지. 며칠 뒤, 그들은 다시 와서 아이의 엄마와 아빠를 데리고 갔어. 아이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골목을 빠져나갔지. 한동안 동네 사람들은 내 아래에 서서 그날 이야기를 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고, 나를 올려다보는 사람도 있었지.

곧 하얗게 눈이 덮이는 계절이 되었고, 눈이 세상을 덮듯, 사람들은 나의 존재도 잊어 갔어. 사람들이 나를 잊어도 난 괜찮았어. 나는 원래 존재감이 없었으니까.

봄이 되었어. 이제 나는 곧 철거될 거래. 새로 오는 녀석은 나보다 눈이 훨씬 좋다더라. 잘 됐지 뭐. 난 무언가를 지키기엔 이제 너무 늙었거든.

봄볕이 내가 서 있는 곳에도 내려앉았어. 나는 오래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지. 햇빛이 따뜻해서인지 자꾸만 눈이 감겼어.

그때 멀리서 낯익은 모습이 보였어. 그 아이였어. 나는 흐린 눈을 부릅떠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 아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던 거야. 아마도 집에 가는 것 같았어. 

아이와 할머니가 내 옆을 지나갈 때, 나는 숨을 죽이고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았어. 아이는 이전보다 살이 올랐고, 키도 좀 큰 것 같았어. 무엇보다 할머니를 올려다보며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는 아이의 표정이 밝아 좋았지.

아이가 가던 발걸음을 멈췄어. 다음 순간,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와 눈이 딱 마주쳤지.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어. 아이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어. 물론 나를 알아본 건 아닐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알아보았지. 

잠시 뒤, 나의 시야가 천천히 흐려지고, 눈앞에 선들이 나타났어. 그러더니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사라졌어. 선들 사이로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어. 그리고 까매졌어.

여성경제신문 서빈 극작가·영화감독·미니픽션작가
michellesu@daum.net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서빈 작가·연출가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상을 전공했다. KBS, EBS, SBS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적 시선을 길렀고, 현재는 공연 극본과 연출, 영화 작업을 넘나드는 창작자로 활동 중이다. 창작 뮤지컬 <길동무 북두칠성> , <날으는 모자> 등의 극본과 가사를 썼고, <컴백홈> , <일등급 인간> 등을 연출했다. 단편 다큐멘터리 <안, 보이다 in, visible> 을 연출해 국내외 영화제에 공식 선정·초청되었으며,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으로 짧은 서사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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