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역경 딛고 50대 스타덤…슬픔·그리움 담긴 전통음악 '모르나' 알려
2002년 한 차례 내한 공연서 한국 관객 만나…북중미 월드컵 돌풍에 재조명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맨발의 디바'로 불린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는 서아프리카 대서양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를 단번에 세계 음악 지도의 중심에 올려놨다.
에보라는 카보베르데 전통 음악인 '모르나'를 세계 무대에 알린 대표적인 가수다. 가난과 역경을 딛고 50대의 늦은 나이에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슬픔과 그리움, 바다를 떠난 이들의 향수를 담아낸 그의 노래에는 식민 지배와 노예제,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겪은 조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41년 카보베르데 상비센트섬의 항구 도시 민델루에서 태어난 에보라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세상을 떠났고, 홀로 일곱 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다. 결국 에보라는 한동안 보육원에서 생활했다.
에보라는 16살 무렵부터 생계를 위해 노래를 시작했다.
카보베르데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해상 교역의 요충지였지만,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하에 잦은 가뭄과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에보라는 항구 주변의 작은 선술집과 카페를 전전하며 선원들과 관광객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푼돈이나 술 한 잔과 식사 등을 대가로 받으며 노래하던 그는 지역에서 '민델루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가난의 굴레를 쉽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1970년대 중반, 조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직후 닥친 경제 위기 속에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10년 가까이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하는 절망적인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 에보라가 유명세를 치르게 된 건 카보베르데의 전통 음악 모르나 덕분이었다.
모르나는 포르투갈의 '파두', 브라질의 '모지냐', 서아프리카의 타악기 리듬이 혼합된 독특한 장르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기착지였던 조국의 비극적인 역사와 굶주림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카보베르데인들의 향수와 그리움의 정서를 담고 있다.
에보라는 대부분의 노래를 포르투갈어가 아닌 카보베르데 크리올어로 불렀다.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도 화려한 기교 없이 툭툭 내뱉는 듯한 그의 묵직하고도 우수에 찬 중저음에 매료됐다.
한동안 평범한 삶을 살았던 에보라는 1988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음악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프랑스에 거주하던 카보베르데 출신 청년 프로듀서 조제 다 실바를 만났다.
실바는 에보라의 목소리에서 세계적인 가능성을 발견했고, 에보라를 끈질기게 설득해 파리에서 '맨발의 디바' 앨범을 발표하게 했다. 그의 국제무대 데뷔작인 이 앨범은 당시 유럽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후 1992년에 발매한 앨범 '향기로운 소녀'가 30만장 이상 팔리는 등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50대에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세계적인 팝스타 마돈나 등 유명 인사들이 그를 치켜세웠다.
반세기를 무명으로 살았던 그는 2003년 발표한 앨범 '보스 다모라'(사랑의 목소리)로 2004년 제46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컨템퍼러리 월드뮤직 앨범상'을 받으며 음악 인생의 최고점을 찍었다.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두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에보라는 결코 화려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카네기홀 같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도 항상 맨발을 고집했다. 척박한 땅에서 신발조차 신지 못하고 살아가는 조국의 가난한 아이들과 빈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의 맨발은 가난한 이들을 향한 굳건한 연대의 상징이었다.
에보라는 생전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공연했고, 2002년 한 차례 한국을 찾았다. 그의 공연은 일반적인 팝 콘서트와는 달랐지만, 카보베르데라는 낯선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음악으로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최근 막을 내린 북중미 월드컵에서 카보베르데 축구 국가대표팀이 보여준 눈부신 선전은 이 작은 섬나라를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중심에 세웠다.
인구 60만명 남짓한 나라의 돌풍에 지구촌 스포츠 팬들이 열광하면서, 카보베르데를 세상에 가장 먼저 각인시켰던 에보라의 삶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라운드 위 선수들이 굽히지 않는 투혼으로 조국의 긍지를 증명했다면, 에보라는 굳은살 박인 맨발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조국의 척박한 역사와 영혼을 세계에 알렸다.
그가 2011년 12월 17일 심혈관계 질환으로 고향 상비센트섬에서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카보베르데 정부는 이틀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며 그를 깊이 추모했다.
현재 상비센트섬의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 '세자리아 에보라 공항'으로 변경됐고, 카보베르데 화폐인 2천 에스쿠도 지폐에도 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에보라는 평생을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조국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정치인도 외교관도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깊은 울림으로 카보베르데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무대 위에서 기꺼이 신발을 벗어 던졌던 맨발의 디바, 척박한 땅의 설움을 달래주던 그의 목소리는 대서양의 파도를 넘어 지금도 상처받은 전 세계인들을 위로하고 있다.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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