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 정상회담을 비롯해 주요 합의를 만들어 냈던 원로 인사들이 이미 수십년 전 남북 간 합의 문서에서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로 명시했다며 북한 국호 불러주기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다만 일단 정부 차원에서 북한의 국호를 정식으로 사용하고 민간에서의 사용은 강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주재한 평화통일고문회의 원로 차담회에 참석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1991년 12월 13일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연형묵' 이라는 이름으로 합의를 했다며 "(북한 대신) 조선이라는 말을 쓰자는 것이 새로운 것 같이 느껴지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임 전 장관은 남북 최초 정상회담이 열렸던 2000년 6월 15일 당시 합의한 남북공동선언에도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명시됐다면서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문서에 사용해왔다. 이후 채택된 남북 합의서들에는 전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서명이 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이를 크게 강조하지 않아서 그렇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라면서 "국민들의 생각을 바꿔 나갈 필요가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역시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 발표 이후 정식 국호를 쓴 남북 합의서가 정상회담 합의문 포함해서 100개가 넘는다"라며 "그동안에 문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그렇게 써놓고 이제 말로 좀 하자는데 그걸 왜 이렇게 겁을 내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이날 회의에 자리한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역시 "대통령이 일부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처음 부른 거는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그 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고 나서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불렀다"라며 "노태우 대통령때부터 이어진 유구한 전통인데, 서로 별명을 부르자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불러주자는 건데 이거 못하겠다고 하면 이는 오만이고 싸우자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백 명예교수는 다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이 조선인데 이 단어는 고조선 때부터, 또 우리가 국가를 상실할 때 빼고는 조선왕조 500년을 조선이라고 했다"라며 "우리 말에서 조선이라고 하면 한반도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로 많은 사람에게 입력이 돼 있어서 이걸 절반의 분단된 국가를 부를 때 (사용할 경우) 뭔가 어색한 데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부에서 조선이라고 불러주자고 해서 사람들이 다 부르지 않는다"라며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공무원들이라든가 또 남북 교섭에 나가는 민간인은 귀찮더라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다 불러주는" 방안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백 명예교수는 공무원이나 북한과 만나는 인원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든지 그건 일종의 언론 자유에 속하는 거니까 내버려 두면 된다. 점차 바꿔가겠지"라고 말했다.
백 명예교수는 남북이 서로 이름을 불러주자는 것이 관계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이름만 불러주고 정작 북한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계속하면 효과가 없다면서 비핵화를 너무 강조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우리 정부는 당장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서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도 밝혔듯이 동결하고 감축한 뒤에 비핵화를 하자는 것인데, 이런 이야기만 해도 저쪽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백 명예교수는 "우리가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궁극적인 비핵화에 대한 꿈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이건 국가 정책의 일부가 돼야 한다"라며 "그런데 꼭 이야기를 안 해도 되는, 무슨 나토 정상회의라든가 G7이라든가 이런 데 가서 비핵화 원칙을 재확인했다며 이것을 외교적 성과인 것처럼 이야기하면, (남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백 번 불러줘 봤자 북에서 볼 때는 저건 적대적 행위라고, 적대적 국가 관계로 가겠다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고 실행할지는 정부에서 결정할 문제"라며 "궁극적으로는 비핵화를 원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고, 쓸데없이 비핵화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정부의 방침이 세워졌을 때 이걸(정식 국호 불러주기) 시행하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
정동영 장관은 "통일부가 이거(정식 국호 부르기)를 끌고 갈 일은 아니고 공론화가 먼저라고 설명드렸는데 일부 언론에서 마치 통일부의 방침이 정해진 것처럼 보도가 됐다"며 통일부가 북한을 조선이라고 부를 것이라는 결정이나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정부가 평화를 강조하다보니 통일을 포기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지적에 대한 조언도 나왔다. 임 전 장관은 "평화와 통일 문제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건 양자 택일이 아니라 선후의 문제다. 선 평화 후 통일"이라며 "역대 민주 정부는 모두 선 평화 후 통일을 기본으로 하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라고 전했다.
임 전 장관은 이재명 정부의 평화공존 정책에서 "'통일'을 빼버려서 통일을 안 하려는 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다"라며 "통일 지향적인 평화 공존 정책"이라는 용어 사용을 제안했다.
정 장관은 이에 대해 "통일 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라고 쓰고 있는데 통일 지향의 평화 공존 정책도 앞으로 병행해서 부르도록 하겠다"라고 호응했다.
이날 회의에는 임 전 장관과 정 전 장관, 백 명예교수 외에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임헌영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정동영 장관은 이들 원로들과 차담회 이후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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