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석주원 기자 |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사 크래프톤은 ‘PUBG: 배틀그라운드(이하 배틀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한국 게임의 글로벌 확장 가능성을 증명한 게임사다.
지난 2007년 블루홀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크래프톤은 2017년 출시한 배틀그라운드가 글로벌 시장에서 크게 흥행하면서 사업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했다. 이듬해인 2018년 사명을 블루홀에서 크래프톤으로 변경한 후에는 배틀그라운드 IP를 기반으로 성장을 지속해 지난해 매출 3조원을 돌파하며 넥슨과 함께 국내 게임산업 양강 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크래프톤의 출발점에는 1세대 벤처 창업가인 장병규 이사회 의장이 있다. 장 의장은 게임 개발자 출신 경영자는 아니지만 네오위즈를 통해 게임산업에 뛰어들었고 크래프톤을 창업한 뒤 오랜 기간 회사의 방향과 주요 의사결정을 이끌었다.
대표이사를 맡아 직접 경영을 지휘하기보다 전문경영인과 개발 조직에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키웠다는 점도 그의 경영 철학을 설명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 벤처 창업 1세대에서 게임업계 입문까지
장병규 의장은 대구과학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카이스트) 전산학과 학사,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을 수료한 공학도다.
석사과정 마무리를 앞둔 1997년 5월, 카이스트 선후배 7명과 함께 네오위즈를 공동 창업하고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으며 벤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당시 네오위즈는 인터넷 접속 환경이 열악했던 점에 착안해 개발한 인터넷 자동 접속 프로그램 ‘원클릭’과 웹 기반 채팅 서비스 ‘세이클럽’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주목받았다.
이후 2003년 게임 포털 ‘피망’을 가동하며 게임 사업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경영 방향성에 대한 이견으로 2005년 네오위즈를 떠났다.
네오위즈를 나온 장 의장은 기술 중심 스타트업인 검색엔진 기업 첫눈을 설립했다. 첫눈은 사용자가 중복해서 찾는 단어에 가중치를 두는 ‘스노우랭크’ 등 독자적인 검색 알고리즘 기술력을 인정받아 2006년 NHN(현 네이버)에 350억원에 매각되며 벤처업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매각 대금의 3분의 1을 함께 고생한 임직원들의 성과급으로 책정한 것도 많은 화제가 됐다. 당시 장 의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벤처의 핵심은 사람”이라며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어 같은 해 초기기업 전문 벤처캐피털(VC)인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를 창립해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뷰노, 오늘의집(버킷플레이스) 등 100여개가 넘는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 및 투자하며 창업 생태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장 의장은 이러한 창업과 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2007년 3월 블루홀스튜디오를 설립하며 다시 한번 게임 시장에 도전하게 된다.
▲ ‘테라’의 시련과 ‘배틀그라운드’로 완성된 반전 드라마
엔씨소프트 출신의 핵심 개발 인력들과 손을 잡고 출발한 블루홀은 4년간 400억원의 개발비를 투입한 대형 MMORPG ‘테라(TERA)’에 사운을 걸었다. 2011년 출시된 테라는 당시 MMORPG들과 차별화된 논타깃팅 전투 시스템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수상하는 등 초기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국내외 시장에서의 흥행 지속성 부족과 해외 유통망 확보 난항으로 투자금 대비 만족스러운 수익을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2010년대 스마트폰 보급으로 시작된 모바일게임 중심의 시장 전환 과정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며 블루홀은 긴 침체기에 빠졌다.
훗날 장병규 의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폐업을 고민했다”는 말로 당시의 위기에 대해 회고한 바 있다.
반전의 계기는 2017년에 찾아왔다. 블루홀 자회사인 블루홀지노게임즈(현 펍지스튜디오) 소속이었던 김창한 당시 개발 PD(현 크래프톤 대표)가 제안한 서바이벌 슈팅 장르 신작 프로젝트 배틀그라운드가 2017년 3월 글로벌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에 앞서 해보기(얼리 액세스)로 출시되면서 크래프톤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배틀그라운드는 출시 후 약 반년 만에 1000만장 판매량을 돌파했으며 현재까지 누적 7500만장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출시 약 10개월 만인 2018년 1월에 세운 최고 동시접속자 수 325만7248명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스팀 역대 최고 기록이다.
배틀그라운드의 대흥행에 힘입어 블루홀은 2018년 지배구조를 개편해 사명을 크래프톤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확장 체제를 갖췄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 8월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에 성공하며 시가총액 20조원 규모의 대형 게임사로 도약했다.
크래프톤은 배틀그라운드 IP를 모바일로 확장해 PC 플랫폼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으며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3조3266억원, 영업이익 1조544억원을 달성하며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올해에도 상반기에만 이미 매출 2조6616억원 영업이익 9725억원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 ‘실패할 자유’와 이사회 중심 경영이 이끈 글로벌 성공
장병규 의장은 “실패할 자유가 없다면 혁신도 없다”는 독자적인 경영 철학에 기반해 창작자의 자율성을 최우선으로 보장하면서 경영과 기획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김창한 PD가 국내에서 검증되지 않은 배틀로얄 장르 개발과 함께 해외 유명 모드 제작자인 브렌든 그린(Brendan Greene)의 영입을 제안했을 때 장 의장은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개발진의 전문성과 열정을 신뢰하며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의장은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경영 대신 투명한 소통과 선진적인 거버넌스 구축에 집중해 왔다. 전사 타운홀 미팅인 ‘KLT(Krafton Live Talk)’를 매월 정례적으로 개최해 경영 현안, 실적, 인사 정책 등을 전 임직원과 공유하고 자발적인 논쟁과 피드백을 장려했다.
크래프톤 이사회의 사외이사 비율을 70% 이상으로 유지하고 여성 이사 비율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등 국내 게임업계 최고 수준의 이사회 중심 경영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 국내 게임산업 역사에 남긴 불멸의 이정표
장병규 의장과 크래프톤이 한국 게임산업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국내 개발사가 글로벌 플랫폼에서 직접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점이다.
한국 게임은 오랫동안 온라인게임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 서비스에 강점을 보여 왔지만 세계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PC·콘솔게임 시장에서는 서구권과 일본 기업에 비해 존재감이 제한적이었다. 배틀그라운드는 이 구도를 바꾼 대표 사례가 됐다.
크래프톤은 개발 스튜디오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기업 아래에서 글로벌 퍼블리싱과 투자, IP 관리를 통합하는 모델을 제시했다. 게임사 내부에 여러 제작 조직을 두고 각 조직이 서로 다른 장르와 플랫폼에 도전하도록 한 방식은 이후 국내 게임업계의 스튜디오 체제 논의에도 영향을 줬다.
장 의장의 역할은 게임을 직접 만드는 개발자의 역할과 달랐다. 그는 개발자에게 권한을 주고 실패를 감당할 자금을 마련하며 성과가 나오기까지 조직을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네오위즈와 첫눈에서 쌓은 인터넷 사업 경험,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를 통한 초기기업 투자 경험도 이러한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크래프톤은 이제 배틀그라운드의 지속적인 성장과 새로운 IP 발굴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배틀그라운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글로벌 스튜디오와 신작을 확대해야 한다는 점, AI 등 새로운 기술을 게임 제작과 서비스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도 남은 과제다. 이제 시장은 장 의장의 리더십이 크래프톤의 새로운 도전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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