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s⑯] ‘독립신문’ 서재필의 의지, 130년을 넘어 오늘에 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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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s⑯] ‘독립신문’ 서재필의 의지, 130년을 넘어 오늘에 닿다

투데이신문 2026-08-06 16:56:24 신고

3줄요약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중략)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도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中

올드스(OLDs)는 ‘오래된’이라는 뜻의 ‘Old’와 ‘소식’이라는 뜻의 ‘News’라는 뜻을 담아 만든 단어입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속보 경쟁에서 벗어나 ‘그때’와 ‘지금’을 짚어봅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지금은 한 모퉁이로 자리는 옮겼지만 마음 한 가운데 남아야만 하는 뉴스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서재필 박사와 독립신문. [사진=AI를 활용한 자체 제작 이미지]
서재필 박사와 독립신문. [사진=AI를 활용한 자체 제작 이미지]

【투데이신문 이서하·유요섭 인턴기자】 1896년 4월 7일, 넉 장짜리 신문 한 부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신문 안에는 어려운 한문도 격식을 차린 문체도 없었다. 오로지 순한글로 쓰인 덕에 양반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조선 땅에 처음 등장한 이 신문의 이름은 ‘독립신문’이다. 창간자는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10년간 미국 망명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정치인이자 의사, 독립운동가인 송재 서재필(1864~1951) 박사였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개혁 요구로 혼란스럽던 조선 말기, 서재필은 누구보다 민중의 힘을 믿었다. 그는 신문을 통해 민중이 세상을 이해하고 스스로 깨어날 수 있어야 나라가 바뀐다고 생각했다.

독립신문은 이러한 서재필의 염원이 담긴 결과물이자 소통과 비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신문이다. 당시 정부에서 발간하던 한성순보·한성주보와 달리 독립신문은 순한글과 띄어쓰기를 사용하는 한편 권력자에 대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

비록 독립신문은 창간 3년 8개월 만인 1899년 12월 폐간됐지만 독립신문의 정신은 제국신문과 황성신문, 나아가 동아일보 등 한국 근대 언론으로 이어졌다. 지난 6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에 문을 연 기자실 ‘서재필방’ 역시 그 정신을 오늘의 언론 현장으로 잇는 상징적 공간이다.

독립신문 창간 13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 근대 언론의 출발점이 된 독립신문이 남긴 정신과 그것이 오늘날 언론에 던지는 의미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독립신문 창간호 1면의 모습.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독립신문 창간호 1면의 모습.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정부와 민중 사이, 독립신문이 놓은 다리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했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거사가 실패하자 처벌을 피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오랜 망명 생활 동안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를 깊이 탐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혁명이 외부 세력에 지나치게 의존했을 뿐 아니라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민중과 정부를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한 서재필이 주목한 것은 신문이었다. 그는 미국 생활 중 신문이 선진 국가를 만드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목도했고 이는 그가 신문이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매체임을 깨달은 계기가 됐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갑신정변 인사들에게 내려진 대역부도죄(반역 등의 임금이나 나라에 지은 큰 죄)가 사면되자, 서재필은 조선 정부의 거듭된 귀국 요청을 받아들여 1895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견제로 근대적 신문을 발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신문을 통해 정부 정책과 사회 현안을 접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정부와 백성 사이의 정보 격차가 여전히 컸다. 이를 절감한 서재필은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고, 국민은 시대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대중매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직접 독립신문 창간에 나섰다.

이 같은 철학은 창간호 논설에 담긴 ‘편벽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문장에서 드러난다. 독립신문이 어디에도 편중되지 않은 공평하고 공정한 ‘언론’으로서 발을 내디딘 최초의 신문이라 평가받는 이유다.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 내용의 일부. [이미지제작=투데이신문]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 내용의 일부. [이미지제작=투데이신문]

탄압 속에서도 대중성·비판정신을 지켜내다

독립신문의 창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창간 1년 전인 1895년 일본은 서울에 한성신보를 창간해 조선 사회의 여론을 장악하고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미국식 교육을 받은 서재필이 신문을 발간해 조선 민중의 주권 의식을 일깨우는 것을 경계한 일본은 조선 정부 인사들을 통해 독립신문 창간을 압박하는 등 견제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독립신문은 끝내 세상에 나왔다. 아관파천 이후 출범한 박정양 내각이 신문 발행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서재필을 적극 지원한 덕분이었다.

창간 초기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하는 격일간지로 정부 시책을 소개했으며, 비교적 정부에 협조적인 논조를 보였다. 그러나 1897년 봄부터는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로 전향해 부정한 일을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을 향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후 정부로부터의 탄압이 가중돼 폐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897년 12월 서재필이 추방당하면서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이어받았다. 구한말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었던 윤치호는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자 애국계몽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독립신문의 논조는 더욱 비판적으로 변했으며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지원하고 민중을 계몽하는 데 힘썼다.

독립신문은 운영 방식에서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 한글판은 1부 2전, 연간 정기구독료 2원60전으로 가격을 낮춰 대중의 접근성을 높였고, 부족한 운영비는 영문판 판매와 광고 수익으로 충당했다. 신문이 구독료와 광고 수익을 기반으로 독립적으로 윤영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이후 민간신문의 탄생과 성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에서 전문가들은 독립신문을 대중성과 비판 기능을 모두 갖춘 ‘근대적 신문’의 효시라고 평한다.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비판 서슴지 않은 독립신문, ‘치우치지 않는’ 정신

그럼에도 서재필과 독립신문은 오랫동안 역사학계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관련 자료가 부족해 사실에 기반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긴 시간을 서재필 연구에 매달려온 이가 있다.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은 지난 1987년부터 40년 가까이 서재필에 관한 연구를 이어온 역사학자다.

홍 소장은 지금까지『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서재필과 그 시대』등을 저술하며 가려져 있던 서재필의 행적을 복원하는 데 힘써왔다. 그는 올해 창간 130주년을 맞은 독립신문 역시 그 역사적 위상에 비해 사회적 관심과 학문적 조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홍 소장은 독립신문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로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지식을 전달하고자 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을 꼽았다. 그는 “한성순보, 한성신문 등 독립신문 이전 신문이 소수의 양반 지식인들만을 대상으로 쓰인 반면 독립신문은 특정한 구독층을 한정하지 않고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짚었다. 

이어 “기존 신문은 정보 전달에 그쳤지만 독립신문은 이를 넘어 비판의 역할을 하고 나아가 시민들을 계몽해 조선이 ‘독립된 나라’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며 “권력자를 비판하고, 시민들에겐 지식을 전달하며 선진 사회를 만들려 했던 최초의 근대적인 신문”이라고 평가했다.

홍 소장은 독립신문의 핵심 정신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도록 공평하고 공정하게 보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문의 시대에 한글 전용으로 신문을 발행하고 당시 흔치 않았던 띄어쓰기까지 도입한 점을 예로 들었다. 

이 같은 시도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누구든지 비판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여주려 한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홍 소장은 “수많은 이해관계로 얽혀있던 조선 말기에 정치·경제적 이익을 버리고 공정 보도를 택한 점은 매우 혁신적이고 선구자적인 정신”이라고 평했다.

1898년 12월 1일 자 독립신문 1면. 당시 독립신문의 민중 계몽 역할은 절정에 이르렀다.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1898년 12월 1일 자 독립신문 1면. 당시 독립신문의 민중 계몽 역할은 절정에 이르렀다.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지금은 각종 매체에서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입니다.

가짜 정보를 구별하기 쉽지 않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회가 분열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지키고자 했던

편벽되지 아니한다’는 사명을 언론이 되찾았으면 합니다.

-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장

독립신문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시민들에게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자 했듯, 홍 소장은 오늘날 언론 또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역할과 책임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말로 독립신문이 세운 신문의 사명과 원칙을 되찾고 계승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진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역시 독립신문에 대해 “우리가 언론에서 지켜야 할 가치가 다 포함돼 있다는 게 가장 큰 의미”라고 평가했다.

그는 독립신문이 △국민 계몽 △상하귀천에 차별 없는 정보 전달 △정부의 잘못에 대한 비판 △편벽되지 않는 보도를 기조로 삼아 정보 전달과 사회 비판이라는 언론의 본령을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편벽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공정한 보도를 지향했다. 정 명예교수는 이것이 한국 언론의 정신적인 전통으로 확립되며 신문의 날이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 7일이 됐다고 덧붙였다.

정 명예교수는 독립신문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사에는 오늘날 신문들이 본받아야 할 언론의 사명과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중도와 비판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다양한 언론 매체의 등장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비판 정신보다 조회수와 화제성을 우선하는 풍조가 확산된 점을 우려하며 “국가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언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안에 문을 연 서재필방 전경. 기자실 로고 좌측에 조그맣게 새겨진 서재필의 이름은 그의 실제 친필을 그대로 본떠 넣은 것이다. ⓒ투데이신문
지난 6월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안에 문을 연 서재필방 전경. 기자실 로고 좌측에 조그맣게 새겨진 서재필의 이름은 그의 실제 친필을 그대로 본떠 넣은 것이다. ⓒ투데이신문

독립신문에서 서재필방으로...언론 정신 이어진다

서재필의 언론 정신은 130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날 다시 한 공간에 새겨졌다. 지난 6월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서재필방’이 문을 열었다. 

서재필방은 한국기자협회 회원과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전국언론노동조합소속 기자, 언론 비평 전문매체 기자들이 운영 시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기자실이다.

한국기자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서재필방이 만들어진 결정적 계기는 특검 취재 현장이었다. 지난해 여름 KT 광화문빌딩 앞에서 김건희 특검팀을 취재하던 기자가 폭염 속에서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고, 안정적으로 취재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면서 기자실 조성 논의가 시작됐다.

이 관계자는 “기자실을 만든다면 한국 언론의 상징인 프레스센터 안에 조성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다고 판단했다”며 “한국언론진흥재단과 문화체육관광부가 함께 사업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개인용 좌석과 브리핑룸을 합쳐 총 70여 석 규모의 기자실에선 서재필의 자취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벽에 걸린 그의 초상화와 설명문, 그리고 기자실 로고에서다.

특히 기자실 로고 좌측에 조그맣게 새겨진 서재필의 이름은 그의 실제 친필을 그대로 본떠 넣은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과 독립신문을 통해 남긴 정신을 기자들이 잊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다.

벽에 걸린 초상화 하단에는 정진석 명예교수가 작성한 설명문이 적혀 있다. 설명문에는 “언론이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치면서도 독립과 민주화·산업화를 선도하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재필 선생의 독립신문이 마련한 터전이 자생의 토대가 됐기 때문”이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130년 전 독립신문에서 시작된 언론 정신을 기자실이라는 공간 하나에 담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편벽되지 아니한다’는 다짐이 새겨진 그 이름 아래, 오늘도 기자들은 그 정신을 되새기며 자리를 지키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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