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에 가입할 때 우리는 보장 내용과 보험료를 꼼꼼히 살핀다. 설계사 설명을 듣고 필요한 서류도 확인한다. 하지만 정작 보험금을 받은 뒤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에 대한 '사용설명서'는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다.
보험금을 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보험은 가입하는 순간보다 보험금이 지급되는 순간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그 돈이 남겨진 가족의 삶을 지탱하기도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의 시작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목돈 지급이 항상 최선은 아니다
보험금은 대부분 한 번에 지급된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받아본 적 없는 큰 목돈일 수도 있다. 물론 일시금 지급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치료비 △생활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가족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도 있고 배우자가 홀로 남는 가정도 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평생 돌봐야 하는 가족도 있다. 그렇다면 보험금도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지급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까.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보험은 오래전부터 준비했는데 보험금을 받은 뒤의 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보험금의 크기는 고민하면서도 그 돈이 가족을 위해 어떻게 쓰이면 좋을지까지 미리 생각해 보는 일은 많지 않았다.
미성년·장애 자녀 위한 안전장치 부족
예를 들어 배우자가 갑작스럽게 큰 보험금을 받게 되면 깊은 상실감 속에서 중요한 금융 의사결정을 혼자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생활비와 노후자금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사용하거나 주변의 투자 권유와 금융사기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충분할 것 같던 보험금이 예상보다 빨리 소진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미성년 자녀에게 보험금을 남기는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성년자는 보험금을 직접 청구하거나 관리하기 어려워 법정대리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보험금을 준비할 수 있지만 그 돈이 △교육비 △생활비 등 자신의 뜻에 맞게 사용되는지까지 사후에 직접 확인하거나 결정할 수는 없다.
장애가 있는 자녀에게 보험금을 남기는 경우에는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스스로 재산을 관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이 대신 관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부모가 바라는 것은 큰돈을 한꺼번에 남기는 일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마다 자녀의 삶을 위해 안정적으로 쓰이도록 하는 것일 수 있다.
보험금청구권신탁으로 지급 방식 설계
가족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지만 보험금은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지급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보험금을 누가 받을 것인가뿐 아니라 받은 돈이 어떻게 쓰이도록 할 것인지까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제도 가운데 하나가 보험금청구권신탁이다.
보험금청구권신탁은 보험계약자가 생전에 사망보험금청구권을 신탁해 두고 사망 후 수탁자가 보험금을 받아 계약에서 정한 방식에 따라 수익자에게 지급하는 제도다. 중요한 것은 보험금을 단순히 누구에게 줄 것인지에 그치지 않고 언제, 얼마를, 어떤 방식으로 지급할 것인지까지 미리 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게는 매달 생활비를 지급하고 자녀에게는 대학 진학 시 등록금을 지급하도록 정할 수 있다.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목돈을 한꺼번에 지급하지 않고 △교육비 △주거비처럼 필요한 목적에 맞춰 나누어 지급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부모가 생전에 품었던 걱정과 바람을 계약에 담아 이어가는 것이다.
생전 돌봄 보험금으로의 확대 논의 필요
물론 보험금청구권신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가족관계와 재산 상황에 따라 적합한 설계는 달라질 수 있고 보험계약과 신탁계약도 함께 살펴야 한다. 누구에게 얼마를 어떤 기준으로 지급할 것인지 역시 충분한 상담을 거쳐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변화는 있다. 보험은 이제 보험금을 지급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이 가족의 삶 속에서 어떻게 쓰일 것인지까지 함께 생각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현재 자본시장법상 허용되는 보험금청구권신탁은 사망보험금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보험을 통해 지급되는 돈은 사망보험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치매보험금이나 장기요양 관련 보험금처럼 살아 있는 동안 본인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보험금도 있다.
치매나 장기요양 상태에서는 보험금이 지급되더라도 본인이 직접 관리하고 사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한꺼번에 받은 보험금을 △치료비 △생활비 △돌봄 비용으로 나누어 오랫동안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이러한 보험금의 지급 이후까지 미리 정해 둘 수 있는 제도적 선택지는 아직 많지 않다.
그렇다고 당장 모든 보험금을 신탁 대상으로 확대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보험금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사용되도록 할 것인가까지 미리 준비한다는 발상은 충분히 논의해 볼 가치가 있다. 보험금청구권신탁은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딘 제도다. 그 의미는 보험금을 지급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이후까지 미리 준비한다는 데 있다.
보험금은 결국 남겨진 사람의 삶 속에서 쓰인다. 그래서 이제는 얼마를 준비할 것인가만큼 그 돈이 어떻게 쓰이면 좋을지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보험금에도 사용설명서가 있을 수는 없을까. 보험금청구권신탁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 보험금청구권신탁= 보험계약자가 생전에 사망보험금청구권을 신탁하고, 사망 후 수탁자가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을 지급받아 신탁계약에서 정한 내용에 따라 수익자에게 지급하는 신탁을 말한다.
여성경제신문 김민수 KB스타자문단 유언대용신탁 자문위원
minsu.kim.tr@kbfg.com
김민수 KB스타자문단 유언대용신탁 자문위원
KB국민은행 신탁부에서 자산승계 신탁 실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KB스타자문단 위원으로 유언대용신탁 자문을 맡고 있다. 금융 및 시니어 관련 매체에서 신탁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유언대용신탁의 실무적 활용 방안을 전파하고 있다. 저서로는 <상속, 신탁의 기준을 바꾸다> 가 있다. 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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