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 최송목 작가 = 스포츠는 오랫동안 보수적인 규범과 정형화된 틀 안에서 움직여왔다. 특히 여성 선수의 복장은 자아 표현의 수단이라기보다 종목의 전통이나 관습에 종속된 경우가 많았다. 정해진 치마, 정해진 색상, 정해진 이미지 속에서 선수들은 경기력 외의 영역에서는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코트와 필드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여성 선수들의 변화는 이러한 통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유니폼은 단순한 경기복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언어가 되고 있다.
최근 프랑스 파리의 롤랑가로스에서 열린 프랑스오픈은 한 편의 패션쇼를 연상시켰다. 일본의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는 코르셋 스타일의 검은 롱 스커트를 입고 등장했다. 경기 직전 상·하의를 벗어던지자 반짝이는 스팽글이 촘촘히 박힌 경기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클레이 코트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이 의상은 오사카만을 위해 특별 제작된 테니스 드레스였다. 그는 "운동선수도 일종의 쇼 비즈니스의 일원"이라며 메이저 대회에 입장할 때마다 자신이 연예인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오사카의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눈길을 끌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운동선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진 존재이며, 경기장은 그 이야기를 표현하는 무대라는 선언이다. 과거 선수들이 정해진 복장을 입고 경기에만 집중했다면, 오늘날의 선수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함께 보여주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오사카가 처음은 아니다. 그 뿌리는 비너스와 세리나 윌리엄스 자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흰색 위주의 경기복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보수적인 테니스계에서 세리나는 청치마와 가죽 부츠, 전신 밀착형 경기복으로 기존의 틀을 흔들었다. 비너스 역시 과감한 디자인의 경기복과 자신만의 패션 브랜드를 통해 선수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이 기존 관습에 낸 균열은 후배 선수들에게 더 넓고 과감한 표현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흐름은 골프에서도 나타난다. 세계 랭킹 1위 넬리 코다는 US여자오픈 공식 기자회견장에 단정한 골프웨어 대신 미국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등장했다. 북중미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 미국 대표팀에 대한 응원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동시에, 솔하임컵 미국 대표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의 유니폼에 여러 의미를 담아낸 영리한 퍼포먼스였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등번호 13이다. 서양 문화권에서 13은 흔히 불길한 숫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코다는 부모님의 생일 간격과 자신의 우승 기록을 연결하며 이를 가장 좋아하는 숫자라고 설명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숫자 해석의 주도권이다. 코다는 세상이 지금까지 규정한 불길함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맥락을 부여했다. 오랫동안 불길함의 상징으로 굳어진 숫자를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행운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손자병법』에 "치인이불치어인(致人而不致於人)“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내 흐름으로 이끌라는 뜻이다. 과거 여성 선수들은 협회의 규정과 종목의 관습, 그리고 사회가 기대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어야 했다. 말하자면 타인이 만든 기준에 끌려다니는 '치어인(致於人)'이라는 객체에 머물렀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수들은 자신만의 상징과 이야기를 만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한다. 대중의 시선에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라, 대중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치인(致人)'의 주체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사카 나오미의 스팽글 드레스와 넬리 코다의 축구대표팀 유니폼은 단순한 패션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메시지를 설계하겠다는 선언이다. 과거 여성 선수들은 정해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만 집중하면 됐다. 의미를 만드는 사람은 협회였고, 브랜드였고, 언론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수들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사카는 경기장을 런웨이로 만들고, 코다는 유니폼 하나로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말한다. 더 이상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 서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유니폼은 여전히 경기복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이기도 하다. 오늘날 여성 선수들은 남이 정한 옷과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말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제 여성 선수들이 달라졌다. 그들은 유니폼을 넘어 자아를 입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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