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배터리가 1% 남고서야 보조배터리를 찾는 게 사람 마음이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건강검진 결과지에 빨간불이 켜지고, 부모님이 수술대에 누워야 "미리 대비할걸" 후회한다. 초고령사회도 다르지 않다. 2023년 기준 몸이 불편한 65세 이상 노인 18.6% 가운데 돌봄을 받는 비율은 47.2%에 그쳤다. 자식도, 국가도 내 노후를 온전히 책임져주지 않는다.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에 충전해야 한다. 복지 전문 기자 김현우의 연재 '돌보다'가 진짜 노후 준비가 무엇인지 뜯어본다. [편집자 주]
한국사회복지사협회가 정보공개를 했다. 2025년 한 해 동안 새로 발급된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9만 2087건이라고 한다. 3년 내리 줄어들다 다시 반등했다. 누적 발급 건수는 165만 8086건이다.
국민 30명 중 1명 꼴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품고 있다는 얘기다. 숫자만 보면 전 국민이 나이팅게일의 현신이요, 대한민국은 복지 인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천사의 나라’임이 틀림없다.
한데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격증은 165만 개가 돌아다니는데, 정작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사회서비스 기관의 절반(48.8%)이 "사람을 못 구해 미치겠다"며 아우성이다. 런닝머신은 165만 대가 팔렸는데, 정작 헬스장엔 뛰는 사람이 없는 시트콤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떠나고, 중장년은 ‘보험’을 든다
통계를 뜯어보면 2030 청년층의 취득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를 5070 중장년층이 밀물처럼 채우고 있다. 자격증 취득 경로도 대학 등 전통적 학과 졸업생보다 학점은행제 출신이 압도적(현장실습 이수자의 65.2%)이다.
뒤늦게 학구열을 불태우며 복지 현장에 뛰어들려는 중장년의 열정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자녀를 키워보고 부모를 모셔본 그들의 연륜은 책상머리에서 배울 수 없는 훌륭한 복지 자산이다.
문제는 뒷면이다. 청년들이 왜 복지 현장을 등질까. 쥐꼬리만 한 월급에, 산더미 같은 서류 작업, 매일 쏟아지는 감정노동과 교대근무까지. 젊은이들에게 이 바닥은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가시밭길이기 때문이다.
반면 중장년층에게 사회복지사 자격증은 퇴직 후를 대비하는 훌륭한 ‘마음의 위안’, 즉 빨래 건조대가 된 런닝머신과 같다. "일단 따두면 나중에 뭐라도 하겠지"라는 심정으로 비교적 접근이 쉬운 온라인 학점은행제를 통해 자격증을 품에 안는다. 한데 막상 체력 소모가 극심한 돌봄 현장에 뛰어들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 결국 자격증은 장롱 속 깊은 곳에 고이 모셔진다.
‘발급기’ 전원 끄고 ‘생태계’를 복원할 때
정석왕 한국사회복지사협회장도 여성경제신문 기획 <김현우의 돌보다> 인터뷰를 통해 "낮은 처우 때문에 청년은 줄고, 쉬운 취득 구조 덕에 중장년은 늘어났다"고 정곡을 찔렀다. 자격증 발급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두고 복지 인프라가 튼튼해졌다고 박수 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현우의>
정책의 패러다임을 확 바꿔야 한다. 정부는 매년 "자격증 몇 개 발급했다"는 영혼 없는 통계 자랑은 그만둬야 한다. 런닝머신 몇 대 팔았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새로 자격증을 딴 9만여 명 중 도대체 몇 명이 진짜 복지관 문을 열고 출근했는지, 1년 뒤에도 그 험한 현장에서 버티고 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청년들에게는 평생의 직업으로 삼을 만한 정당한 임금과 승진 사다리를 놓아주어야 한다. 중장년들에게는 체력적 부담을 줄이면서도 그들의 인생 지혜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직무를 설계해 주어야 한다. 현장의 노동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165만 개가 아니라 1000만 개의 자격증을 찍어낸다 한들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장롱 속에 잠든 165만 개의 자격증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펄떡이며 숨 쉬게 하려면, 현장을 ‘일할 맛 나는 곳’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거실의 런닝머신 위에서 다시 땀을 흘리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뛰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목표를 쥐여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음은 정석왕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과의 인터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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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사회복지사 자격증 보유자가 160만명에 이르면서 자격의 양적 확대보다 전문성과 처우를 함께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깊이 공감한다. 사회복지사는 국민의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다. 그 이름에 걸맞은 엄격한 자격 관리와 전문성 강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우선 전문가로 성장하는 첫 단계인 현장 실습부터 체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무분별한 자격증 공급과 시설장 자격 기준 문제도 더는 외면할 수 없다. 학계와 함께 제도의 빈틈을 보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전문성과 신뢰를 담보할 수 있도록 하겠다. 사회복지사를 명실상부한 전문가 집단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처우 개선의 출발점이다.”
ㅡ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확대되면서 사회복지사는 의료·간호 등 여러 직역과 함께 일하고 있다. 사회복지사의 역할과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방안은 무엇인가.
“통합돌봄이라는 배의 조타수는 사회복지사가 맡아야 한다. 의료계가 진료와 회복 등 신체적 치료를 담당한다면, 사회복지사는 끊어진 사회적 관계망을 연결하고 지역사회 자원을 엮어 이용자의 삶 전반을 지원한다.
각 직역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도 서로 맞물려 움직이는 체계가 필요하다. 추진 중인 사회복지사법에 ‘사례 관리’를 사회복지사의 고유한 전문 영역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뒷받침할 교육 체계도 강화하겠다.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 해야 사회복지사의 전문성과 처우도 함께 높아질 수 있다.”
ㅡ 사회복지사들은 헌신이라는 이름 아래 폭언과 폭력, 부당한 대우를 감내해 왔다. 현장 종사자를 보호할 제도적 방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다. 숭고한 희생을 요구하며 사회복지사 개인의 인내에 기대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현장에서 겪는 폭력과 부당한 대우는 제도가 보장해야 할 안전권의 문제다.
다행히 처우개선법 개정으로 인권침해 금지와 보호 조치가 명문화됐다. 이제 법 조항이 종이에 머물지 않고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권익지원센터를 통해 법률·심리 지원의 문턱을 낮추고,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안전 매뉴얼도 촘촘하게 마련하겠다. 사회복지사가 안전해야 국민의 복지도 지킬 수 있다.”
ㅡ 돌봄 현장의 인력난이 심화하면서 외국인 인력 도입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복지사 처우 개선과 인력 확충을 함께 풀기 위한 협회의 입장은.
“초고령사회가 불러온 인력난을 고려하면 외국인 인력 도입 자체를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다. 다만 돌봄은 사람의 생명과 일상을 다루는 고도의 전문 영역이다. 언어 소통뿐 아니라 문화적 이해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인원 충원에만 매달려 성급하게 문을 열 경우 복지 서비스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근본적인 해법은 현장을 떠난 국내 인력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열악한 노동 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 있다. 외국인 인력은 철저한 검증을 거쳐 현장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보완재로 기능해야 한다.”
ㅡ “사회복지사가 자신의 권리를 지킬 때 비로소 약자도 지킬 수 있다”고 밝혔다. 임기 동안 사회복지사들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누군가의 짙은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의 삶과 노동부터 단단하게 보호돼야 한다. 사회복지사들은 갈수록 가혹해지는 사회적 재난 속에서 국민의 안전망을 만들어가는 필수 전문가다.
임기 동안 사회복지사의 노동과 땀이 정당한 가치로 인정받는 세상을 만드는 데 모든 것을 걸겠다. 국민에게는 ‘사회복지사가 있어 참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을 주고, 160만 회원에게는 ‘우리가 손을 잡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돌려드리고 싶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우 기자
hyunoo9372@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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