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임준혁 기자 | 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북극항로 시범운항이 이달 말 첫 항해를 앞두고 선박 확보와 화물 모집 등 실무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시범운항은 북극항로 중 노르웨이 북쪽 해안에서 시베리아 북쪽 해안을 따라 베링 해협까지 연결된 북동항로(NSR)를 이용할 계획이다.
한국이 NSR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법령 준수는 물론 협력이 기본 전제다. 하지만 러시아로부터 NSR 이용 허가를 받는 것보다 대러시아 제재 기조를 강화하고 있는 미국이 한국의 시범운항 승인을 까다롭게 내릴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 먼저 해결돼야 (시범운항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업계에 따르면 해양수산부는 이달 22일 부산항 출항을 목표로 팬스타라인닷컴을 시범운항 사업자(선사)로 선정하고 27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을 투입해 부산-로테르담 구간을 운항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 이달 22일 부산 출항 목표...운항준비·화물 확보 중
극지 운항의 필수 요건인 ‘극지운항증서(Polar Ship Certificate)’를 이달 중순 안에 한국선급으로부터 발급 완료를 목표로 하는 등 운항 준비와 용선이 대부분 마무리됐으며 1300TEU 규모의 화물 확보도 진행 중이다.
운항 선사인 팬스타라인닷컴의 모회사 팬스타그룹은 지난달 31일 HMM이 보유·운영해 온 2700TEU급 컨테이너선 ‘몸바사(Mombasa)호’의 매입 계약을 완료했다. 팬스타그룹은 이 선박의 이름을 북극항로 운항 의미를 담아 ‘팬스타 아크로(PANSTAR ACRO)호’로 변경하는 한편 이달 초 부산항 신항에 입항시킨 후 선체의 내빙 기능을 강화하는 등 극지 운항에 필요한 보완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해운·극지 전문가들은 북극항로 시범운항 사업이 이제 해운의 영역을 떠나 우리 정부의 외교 역량에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오는 22일 출항 예정인 팬스타 아크로호는 러시아가 관리하는 NSR을 이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 선박은 러시아로부터 항행 허가를 받고 쇄빙 정보, 기상정보, 항행 지원 서비스 등을 제공받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거래가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 체계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가령 한국 국적 선박이 NSR을 통과하면서 러시아 쇄빙선의 에스코트(인도)를 받을 때 발생하는 비용 지급이 대러 제재에 저촉될 수 있다는 것이다.
▲ NSR 통과시 러시아 쇄빙선 이용...대러 제재 저촉
이 같은 문제는 올해 초 이미 제기된 바 있다. 지난 1월 김성범 해수부 장관 직무대행은 북극항로 시범운항에 있어 유럽연합(EU) 등 서방 진영이 러시아에 가하는 경제 제재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당시 김 대행은 "러시아에서 수역 통과에 따른 허가를 요구하고 있고 북극항로 상황에 따라 (러시아) 쇄빙선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어 협력은 필수적"이라면서도 "한국이 미국·EU 등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참여한 입장에서 그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어 양측을 모두 이해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확인 결과 현재 정부 당국이 이 사안과 관련해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막판 협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현재 국제정세를 감안했을 때 미국이 사실상 이를 용인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 당국, 막판 협상 중...美 시범운항 용인 가능성 희박
북극정책 전문가는 "러시아가 우리 선박의 NSR 통항 허가를 내줄 지 여부보다 미국이 이를 인정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문제"라며 "현재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집행 중인 만큼 한국만 예외를 인정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도 "미국이 한국에 표면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비치진 않더라도 북극항로 시범운항 승인을 미루거나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정부의 사업 추진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실제 미국 의회에서 현재 대러 추가 제재 법안이 논의되고 있고 트럼프 2기 행정부 역시 최근 러시아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NSR을 이용하는 북극항로 시범운항 사업을 굽히지 않는다면 외교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최악의 경우 시범운항 일정 자체가 조정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 “NSR 대신 알래스카 지역 자원으로 타깃 바꿔야”
익명을 요구한 국제정치 전문가는 "현재 분위기상 미국과의 조율이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라며 "정부가 사업을 강행하기보다 일정 연기나 필요 시 사업 재검토까지 고려하는 것도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번 시범운항의 성패는 선박 운항 능력 등 해운의 영역이 아닌 서방의 대러 제재라는 국제관계에서 출발한 정치·외교적 역학 관계에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크다고 업계·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장한다.
북극을 둘러싼 러시아와 미국의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북극항로는 더 이상 단순한 신규 대체 해상운송 루트가 아닌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 간 외교와 안보, 대러 제재가 복합적으로 얽힌 전략 사업으로 성격이 변모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해운물류 전문가는 “중국조차 미국의 대러 제재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라며 “중국에서 북극항로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화물 수요는 충분하지만 글로벌 4위 정기 선사인 중국 코스코(COSCO)가 북극항로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NSR 항행 시 러시아와 항행 지원 서비스 거래를 하는 순간부터 미국의 대러 제재가 작동, 전 세계 화주로부터 외면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미국의 대러 제재와 관련 외교적 해법이 선행되지 않으면 북극항로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로선 거의 전무한 수준인 화물 수요 등 북극항로의 낮은 경제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러시아가 NSR 통항 선사들에 대해 취해 온 강압적인 서비스 제공 및 거래 대금 수취 이력도 북극항로 시범운항의 지속 가능성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며 “현실적인 대안으로 미국과의 외교 협력을 강화해 북극항로 루트에 위치한 알래스카의 유전 개발, 액화천연가스(LNG) 도입으로 타깃을 바꿔야 한다. 한국이 보유한 우수한 조선 기술과 정부의 자원 외교 역량을 십분 발휘해 불확실성이 높은 NSR 이용 대신 미국, 캐나다 지역 북극항로를 관심 있게 보는 합리적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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