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지역을 택하다]체험 넘어 창업과 정착, 글로컬로 성장 돕는 ‘집단지성’의 힘
도시는 성공을 향해 바쁘게 달리는 곳이고, 지역은 보다 안정적인 삶을 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30년을 살아온 김만이 집단지성 대표(37)가 깨고 싶은 편견이다.
김 대표는 지난 7월 23일 머니투데이 <더리더>와의 인터뷰에서 “도시에서도 안정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고, 로컬에서도 바쁘게 일하며 성공을 꿈꿀 수 있다”며 “저와 집단지성은 후자에 가까운 꿈을 꾸며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지역에서의 삶은 낭만적인 귀촌과는 거리가 있다. 자신의 일을 만들고 성과를 내려면 도시에서만큼 치열하게 움직여야 한다.
충남 홍성군에서 활동하는 로컬창업가 커뮤니티 ‘집단지성’은 이 가능성을 청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모였다. 청년들이 지역을 둘러보고 체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역량과 지역 자원을 연결해 사업 아이템을 실험하고 창업과 정착, 성장까지 이어가도록 돕는다.
◇흩어진 ‘모래성’을 단단한 성으로…로컬창업가들의 ‘길드’
김 대표는 대학원에서 농업자원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입사했지만 농업과 농촌을 글과 데이터로만 접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그는 “농업과 농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현장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입사 1년 만에 연구원을 그만두고 현장 연구·컨설팅 회사로 옮겨 약 4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여러 지역을 경험하며 그가 확인한 것은 지역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치와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2020년 김 대표는 연고도 없던 홍성에서 창업했다. 전국 유일의 유기농업특구이자 유기농업의 발현지로 알려진 홍성에서 철학을 가진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지역에서 사업을 지속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시장과 인력이 부족했고 정보와 창업 인프라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김 대표와 함께하던 초기 5개 팀은 모두 서울과 경기, 군산 등에서 홍성으로 온 외지 청년 창업가였다. 분야는 달랐지만 혼자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은 같았다.
김 대표는 당시 상황을 ‘모래성 쌓기’에 비유했다. 청년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각자의 성을 쌓다가 바람이 불면 사라지고, 누가 언제 떠났는지도 알기 어려운 구조였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모래성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단단한 성을 쌓자는 의미에서 집단지성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집단지성은 친목 커뮤니티보다 과거 상인조합인 ‘길드’에 가깝다. 만남 자체보다 구성원의 성장과 성취가 목적이다. 각 창업자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도록 도우며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이들의 연합 활동은 2023년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되며 본격적으로 확장됐다. 집단지성은 청년을 지역으로 체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실험-창업-안정-성장-글로컬’로 이어지는 6단계 성장모델을 만들었다.
첫 단계에서는 청년이 홍성을 경험하며 지역 자원과 자신의 역량을 연결한다. 이후 시제품으로 사업 가능성을 실험하고, 창업한 청년은 2년 안에 손익분기점을 달성하는 안정화 과정을 거친다. 그다음에는 전국과 해외 시장을 바라본다.
외부 청년의 첫 진입 프로그램은 3박4일 ‘로컬 온보딩캠프’다. 참가자는 12곳 이상의 지역 자원을 살펴본다. 사업장과 공간을 방문한 뒤 저녁에는 ‘내 능력으로 이 지역의 무엇과 결합해 어떤 일을 만들 수 있을지’를 기록하고 토론한다.
일정이 촘촘해 참가자 사이에서는 ‘창업유격캠프’라는 말도 나온다. 김 대표는 로컬을 여유롭고 편안한 공간으로만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역에서도 안정적인 소득과 성취를 만들려면 치열한 실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풍경뿐 아니라 작은 시장과 판로의 한계, 창업가의 시행착오까지 보여주는 이유다.
정착을 강요하지 않는 것도 원칙이다. 김 대표는 3박4일 경험만으로 기존 직장과 주거,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이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당장 정착하지 않더라도 지역과 관계를 이어가거나 자신의 삶에 맞는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결과로 본다.
◇홍성을 떠나고 싶던 청년…홍성에서 ‘내 일’을 만나다
집단지성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이채원씨(29)는 대학 진학을 계기로 홍성에 왔다. 전북 군산 출신인 이씨가 대학생 신분으로 처음 마주한 홍성의 첫인상은 군산보다 작고 조용한 지역이었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 홍성역에서 대학가로 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타면 요금이 1만원을 넘기도 했다. 2019년에는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홍성을 떠나고 싶은 이유’를 인터뷰해 전시했다. 처음부터 졸업 후에도 홍성에 남을 계획은 없었다.
그런 그가 홍성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것은 대학 재학 중 창업에 도전하면서부터다. 이씨는 대학생들에게 아침밥을 먹는 문화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아침식사 배송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업을 위해 지역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유기농의 가치를 지키며 농사짓는 농부들을 만났고, 이들과 같은 지역에서 협력하며 살고 싶었다.
이후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샐러드 사업 등을 운영했지만, 4년 뒤 폐업했다. 함께 사업하던 친구는 서울로 이주해 취업했다. 이씨도 홍성에 남을지를 두고 고민했다. 그는 지역을 떠나는 대신 협업 관계를 맺고 있던 집단지성 운영팀에 합류했다.
현재 이씨는 집단지성 크루들이 매월 목표를 선언하고 달성률을 공유하는 ‘월간 집단지성’과 외부 청년들이 홍성을 경험하는 ‘로컬 온보딩캠프’ 등을 기획·운영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집단지성의 활동과 지역 이야기를 기록하고 지자체·기업과의 협업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이씨는 집단지성을 찾는 청년들이 자신이 하려는 일이 지역과 맞는지를 고민하고, 낯선 지역에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데서 막막함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역 정착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인 것 같다.”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실패하거나 흔들려도 다시 시도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있는지가 정착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박4일 지역살이로 방문한 홍성에서 이주·창업까지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오신영 대표(27)는 집단지성의 지역살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홍성으로 이주했다. 디자인 기획과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그는 현재 지역에서 디자인과 소규모 공간 운영을 업으로 삼아 사람과 공간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오 대표는 평소 수도권 밖 지역에 관심이 있었지만, 실제 이주나 지역 생활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있는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SNS에서 집단지성의 프로그램 광고를 보고 지역에서 직접 살아볼 수 있다는 점에 끌려 지원했다.
그가 참여한 로컬 온보딩캠프는 3박4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프로그램 동안 홍성에서 자신의 일을 만들고 있는 창업가들을 찾아갔다. 홍고통 골목에서 소시지 펍을 운영하는 청년과 해방을 주제로 동네책방을 운영하는 청년, 제철 재료를 활용해 소규모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부 등을 만났다.
그는 “‘지역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일할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침부터 이어진 일정이 끝난 뒤에는 참가자들과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고민을 먼저 했던 사람들을 만나 대화한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프로그램 이후에는 지역 해커톤(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 대회)과 시제품 제작 지원 등을 통해 창업 아이템을 검증했다. 집단지성은 오 대표가 정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거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단기간 머물 수 있는 공간도 연결했다.
오 대표는 삶의 전환기에 여러 선택지를 고려하다 홍성 이주를 결정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홍성의 매력은 결국 홍성에서 만난 사람들인것 같다”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라면, 내 일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밝혔다.
현재 오 대표는 로컬 디자인랩 ‘모모레’와 모임공간 ‘이이소’를 운영하고 있다. 모모레에서는 지역 청년 창업가의 리브랜딩과 지역 행사 관련 디자인 업무를 하고, 이이소에서는 누구나 워크숍을 시험해볼 수 있는 공간을 목표로 다양한 성격의 모임을 직접 기획·운영하고 있다.
창업 공간을 마련할 때는 집단지성 크루들이 공사에 함께 참여했다. 집단지성은 이를 ‘DIT(Do It Together)’ 문화라고 부른다. 오 대표는 “창업한 사업체는 온전히 대표가 짊어져야 한다는 점이 부담이 된다”며 “옆에서 같이 고민하고 위로하고 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료를 이어주신 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비대면 소통이 대부분이었지만, 홍성에서는 가능한 한 상대방을 직접 찾아간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소개를 통해 예상하지 못했던 협업이 생기기도 한다.
오 대표는 홍성에서 창업하며 느낀 장점으로 사람 사이의 가까운 거리를 꼽았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빠르게 연결되고 직접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 작은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기 쉽다는 설명이다. 반면 방문 고객만으로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지역시장 규모도 크지 않아 지역 밖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오 대표는 “청년마을 프로그램은 낮은 기회비용으로 타 지역의 매력을 탐색할 기회를 주는 점에서 청년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며 “모르는 지역을 무작정 찾아갈 용기와 여유가 모두에게 있지는 않은 상황에서, 지역이라는 선택지를 훨씬 현실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게 만들어줬다”고 설명했다.
◇창업 26팀·정착 20팀…‘로컬스타트업빌리지’를 향해
김 대표에 따르면 집단지성을 통해 3년 동안 창업한 팀은 26개. 이 가운데 홍성에 정착한 팀은 약 20개다. 2023년 프로그램에 참여한 육가공 브랜드 ‘튜베어’는 이듬해 소시지 펍을 열었고 1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이처럼, 집단지성은 참가자 수보다 창업 이후에도 지역에서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성과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들이 자리 잡은 홍고통은 홍성고등학교와 터미널 이전 후 빈 점포가 늘어난 원도심 거리다. 최근 청년 창업가들이 사업장을 하나씩 열면서 골목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김 대표는 관광객이 몰리는 화려한 상권보다 손님이 적은 날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업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역 밖에서도 매출을 만들 수 있는 사업모델을 갖추고, 그 수익과 활동이 다시 지역으로 흘러들게 해야 지속 가능한 활성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집단지성의 목표는 한두 곳의 유명 매장보다 작은 골목 브랜드와 전국·해외 시장을 향하는 기업이 서로의 다음 도전을 돕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군과도 매년 3~4개 팀을 꾸준히 정착시키고 성장시키는 방향을 공유하고 협업하고 있다.
김 대표는 앞으로 홍고통을 넘어 홍동면과 광천읍 등으로 창업가들의 활동 기반을 넓힐 계획이다. 그는 “로컬은 여전히 정직한 복리가 통하는 곳”이라며 “작지만 단단한 성취가 오랜 시간 쌓이면 누군가의 또 다른 도전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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