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일본 다카이치 내각과 의회가 옛 왕족 가문 남성이 왕족의 양자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취지로 황실전범을 개정했다. 이후 다카이치 내각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황실전범 개정 논란은 지지율 하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됐다. 황실전범 개정 속에 숨겨진 일본 덴노 승계 규정의 폭탄은 무엇일까?
일본 의회가 일본 왕실의 구성과 왕위 계승 방식을 규정한 황실전범을 약 79년 만에 대폭 개정했다. 1947년 황실전범 시행 이후 왕실 구성과 왕위 계승의 기반을 건드리는 실질적 개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중의원(하원)은 지난달 10일 황실전범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참의원(상원)은 지난달 17일 이를 의결했다.
79년 만 개정
개정안에 따르면, 여성 왕족은 일반인과 결혼한 이후에도 왕실에 남을 수 있다. 아울러 지난 1947년 이후 신적강하돼 왕실을 떠난 옛 왕족 가문의 남성도 왕족의 양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양자가 된 본인에게 왕위 계승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의 남계 남자 자손에게 왕위 계승 자격이 열릴 수 있다.
가장 첨예한 조항은 왕실을 떠난 옛 11개 미야케(궁가)의 후손 중 부계 혈통이 이어지는 남성을 왕족의 양자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대목이다. 황실전범은 여전히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승계한다”는 원칙을 유지한다.
이번 개정은 이 원칙을 바꾸지 않은 채 옛 11개 미야케 출신 남계 남성을 왕족의 양자로 받아들이는 통로를 새로 연 것이다. 입양 대상은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15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된다. 지금까지는 덴노와 왕족이 양자를 들이는 것이 금지돼있었다.
논란이 커지는 지점은 양자 본인이 아니라 그다음 세대다. 양자가 된 남성 본인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지만, 그다음 세대 남성에게는 덴노 계승 자격이 생길 수 있다.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외동딸 아이코 공주만 있는 만큼, 이 조항은 곧 여성 덴노와 여계 계승 문제를 우회하는 장치로 읽혔다.
일본 역사에서 여성 덴노 자체가 금기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일본에는 총 8명의 여성 덴노가 있었고, 이 중 2명은 두 차례 즉위했다. 다만 보수파는 이들이 모두 부계로 왕통에 속한 남계 여성 덴노였고, 이후 왕통도 남계 계승의 틀 안에서 이어졌다고 본다. 예컨대 고교쿠·사이메이 덴노는 비다쓰 덴노의 증손녀이자 조메이 덴노의 황후였고, 그 아들 덴지 덴노도 조메이 덴노의 아들이었다.
문제는 입양 대상인 옛 궁가 후손과 현 덴노의 혈연관계가 36~38촌에 달한다는 점이다. 공통 조상을 찾으려면 약 600년 전 무로마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만큼 먼 혈족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왕족 편입 대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그래도 남계 혈통이 이어져 있다”는 논리 때문이다.
여성 왕족 잔류·옛 왕족 양자도 허용
다음 세대 핵심…여계 계승 우회 논란
일본 여론은 이번 개정을 대체로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황실전범 개정이 사실상 아이코 공주의 승계론을 우회·차단하는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교도통신>이 지난 2024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 덴노 즉위 찬성 여론은 90%로 집계됐다. 올해 <주간문춘> 온라인 긴급 설문에서도 여성 덴노 즉위 찬성 여론은 93%로 집계됐다. 당시 두드러졌던 의견은 “여성 덴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거나 “여성 차별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반발은 다카이치 내각 지지율 하락에서도 드러났다는 해석이 나온다. <마이니치신문> 월례 조사 기준 지난 2월 중의원 의원 선거 압승 당시 다카이치 내각의 지지율은 61%로 집계됐다. 이후 지지율은 3월 58%, 4월 53%, 5월 50%로 내려갔고, 6월에는 51%로 소폭 반등했다.
하지만 지난달 19일 기준 조사에서는 지지율이 41%까지 떨어졌다. 다카이치 내각의 지지율 50% 선이 처음 무너진 것으로 확인됐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이 조사에서 처음으로 지지율을 앞섰다. 지지율 하락 원인으로는 ▲황실전범 개정 논란 ▲고물가 대응에 대한 불만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럼에도 자유민주당 등 보수파가 남계 승계 고수론을 놓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여성 덴노 찬성 여론은 넓지만 얕고, 남계 승계 고수론은 좁지만 깊다. 남계 승계 고수론의 밑바탕에는 ▲황통 원리 ▲보수 정체성 ▲당내 우파 결속 ▲히사히토 계승 가능성 보전 등 네 가지 동기가 깔려 있다. 히사히토는 나루히토 덴노의 유일한 남성 조카다.
히사히토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여성 덴노 탄생 자체보다 여계 덴노의 탄생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아이코 공주가 즉위하면 아이코 공주 자녀의 계승권 문제가 불거진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보수파는 이를 막기 위해 남계 승계를 고수하려는 것이다.
아이코는 안정감
히사히토는 진학
일본 보수파는 만세일계 관념을 중시한다. 만세일계란 제1대 진무 덴노부터 현재까지 황통이 단절 없이 이어져 왔다는 관념이다. 현대 일본 보수파는 이 연속성을 주로 남계 혈통의 연속성으로 해석한다. 이는 국가 정통성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들의 역사관에서는 진무 덴노가 일본 신화의 최고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관념이 작동한다. 이들에게 혈통의 연속성은 일본 국가의 특수성과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2000년 넘게 지켜온 왕실의 정통성과 일본의 국가적 근본을 여기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여계 승계를 인정하는 것은 정통성을 스스로 붕괴시키는 행위로 간주된다.
아울러 여성 덴노의 존재를 인정하면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 친왕의 정통성 논쟁이 불거진다. 정통성 논쟁은 결국 여론 경쟁의 장으로 이어진다. 국가의 상징인 덴노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히사히토 친왕을 둘러싸고는 진학 과정을 놓고 특혜 논란이 반복적으로 제기됐다. 일본 왕족은 전통적으로 가쿠슈인으로 진학한다. 하지만 히사히토 친왕은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 ▲쓰쿠바대 부속고교 ▲쓰쿠바대 등으로 이어지는 비전통적 경로를 택했다.
쓰쿠바대 부속고교는 경쟁률과 상징성이 큰 명문 국립학교로 알려졌다. 그의 진학은 오차노미즈여대와 쓰쿠바대 사이의 제휴교 진학 제도를 통해 이뤄졌다. 이 때문에 “특혜 아니냐”는 여론의 비판이 이어졌다. 쓰쿠바대 진학 이전에는 도쿄대 추천 입학설이 확산돼 반대 서명운동이 진행됐던 바 있다.
반면 아이코 공주는 여론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는 나루히토 덴노의 유일한 자녀라는 점에서 국민 정서를 움직이고 있다. 아울러 일본에서 튀는 행보 대신 품위·절제·성실함을 보여주는 왕실 구성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한 이후 지난 2024년 4월부터 일본적십자사 상근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왕실 공무도 병행하고 있다.
아이코 공주는 스스로 일본적십자사에서 근무하는 이유로 “대학 시절 복지 관련 수업을 들으며 복지 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며 “공무 외에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점을 들었다. 이는 일본 대중이 왕실 구성원에게 기대하는 봉사·겸손·공공성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아울러 나루히토 덴노와 마사코 황후의 현대적이고도 절제된 왕실 이미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여론 역풍
이번 개정은 여론의 다수 의견보다 자민당 보수파의 제도 논리가 우선된 장면으로 읽힌다. 하지만 황실전범 개정은 다카이치 내각이 처음 겪는 지지율 급락으로 이어졌다. 대중은 왕실의 현실적 한계에 맞춘 새로운 문을 요구했지만, 보수파 중심의 정계는 남계 승계의 문법을 고수했다. 일본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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