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한스경제 박종민 기자 | 골목 어디선가 경찰차가 불쑥 나타나 급커브를 반복하며 총격전을 벌일 것만 같았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호프(HOPE)’에서 배우 황정민(고범석 역)과 정호연(임성애 역)이 탄 경찰차가 거대한 외계 생명체를 집요하게 쫓아가며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러닝 타임 156분이 유독 짧게 느껴지는 건 기술력과 촬영 기법이 한몫했다. 추격신에서 특수 촬영팀의 기술력이 빛을 발해 입체감을 더했다. 액션의 역동성과 남다른 미장센까지 어우러지면서 영화의 시각적 몰입감은 훨씬 높아졌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폐허가 된 영화 속 골목의 모습과는 달리 시간이 흐른 뒤 찾은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마을 일대는 비교적 고요하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해남군은 호프의 촬영지인 이 일대를 테마 거리로 조성했다. 영화 속 배경인 비무장지대 호포항의 주무대다. 황정민과 정호연 등 주연 배우들은 2023년 10월부터 약 3개월 간 이 일대에 머물며 촬영했다고 한다. 1970~80년대 정취를 재현한 공간인데 실제 거닐어 보니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겼다. 황정민이 괴물의 정체를 추적하며 들어간 ‘금복정육점식당’을 비롯해 곳곳에서 ‘불법무기 자진신고’, ‘정의사회 구현’ 등 시대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황정민이 총 들고 있던 그 거리
북평 호프 영화의 거리에 들어서자 외계인의 거대한 발자국부터 시선을 모았다. 거리를 따라 걷자 영화 포스터 앞에 황정민과 정호연이 탔던 현대자동차의 스텔라 경찰차가 주차돼 있었다. 스텔라는 1983년 출시된 중형 세단인데, 극 중 1980년대 시대 고증을 위한 하나의 장치 역할을 했다. 이후 보이는 담장에는 배우들의 영화 속 모습이 필름 형식으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테마 거리 건물에는 총을 들고 있는 황정민의 모습, 긴장한 표정으로 스텔라를 운전하고 있는 정호연의 모습 등이 벽화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1~2층으로 된, 낮고 낡은 단색의 건물들이 주를 이뤘다. 남창마을 일대 바다는 평온한 분위기였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 보이는 갯벌과 산의 푸르름이 특유의 운치를 자아냈다. 영화 속 호포파출소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재현해 놓은 곳은 있다. 내부에선 주연 배우들의 극 중 역할 및 서사와 핸드 프린팅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호포읍 지도와 함께 낡은 쇼파, 성냥갑, 재떨이 등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도 놓여 있다.
사실 남창리 일원은 조선 초기부터 수군 진성이었던 ‘달량진성’이 있던 곳이다. 1555년 왜구들이 대거 침입했던 역사적인 사건 ‘을묘왜변’의 중심지이자, 치열한 호국 정신이 깃든 상징적인 장소다.
전체적으로 남창리가 위치한 북평면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끝의 관문이자,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사, 교통,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오랫동안 영암땅이었던 북평지역은 광무 10년(190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남군으로 편입됐다. 이어 1914년 북평시종면과 북평종면을 합병해 공식적으로 북평면의 이름을 갖게 됐다. 해남 관광 관계자는 “해남은 광주 면적의 2배로 농작지가 가장 넓은 지역이기도 하다. 해남 달마산의 경우 영화 호프에서 소를 찾던 배경 지역으로 등장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꼭 가봐야 하는 관광 코스 땅끝
닭 주물럭, 닭 백숙 등 닭요리와 회, 굴비 정식, 갈치 조림 등 해남 로컬 미식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 코스다. 물론 뭐니 뭐니 해도 해남의 필수 관광 코스 중 하나는 바로 땅끝마을이다.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일원인데, 이곳은 국토 최남단이라는 독보적인 상징성을 지닌 지역이다.
햇볕의 기운이 드센 날 바닷가에 비치는 윤슬의 자태도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때론 윤슬의 눈부심을 오롯이 느끼며 땅끝으로 향했다. 한참을 걷자 북위 34도 17분 32초의 송지면 갈두산 땅끝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국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반도의 시발점이자 끝이다. 대륙과 해양의 접점인 이곳에서 셀피를 남기는 것도 추천한다.
땅끝에서 울리는 세 번의 종소리도 들어볼 만하다. 종을 세 번 쳐봤다. 첫 번째 종은 지나온 시간을 내려놓는 소리, 두 번째 종은 나를 돌아보는 소리, 세 번째 종은 새로운 길을 여는 소리로 의미를 담았다. 땅끝에서 여정의 새로운 시작을 다시 알렸다.
▲울돌목에서 떠올리는 명량대첩
해남군 우수영 관광지에 있는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은 명량대첩의 의미를 기념하는 곳이다. 명량해전은 1597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이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 수군의 대규모 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다. 일자진 전술은 아직도 회자하고 있다. 일자(一) 형태로 십삼(十三)척의 배를 배치해 울돌목 바다 좁은 길목을 막아 일본 수군의 공격에 맞선 전술이다.
기존의 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든 거북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다. 1413년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고, 2년 후에는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돼 있다.
거북선은 2014년 7월 30일 개봉작인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을 떠올리게 한다. 1597년 조선 수군의 명량대첩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1761만3682명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사상 최다 관객 기록을 세운 대흥행작이다.
해남군 문내면에 위치한 명량해상케이블카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 맞서 조선을 지켜낸 명량대첩 승전지 '울돌목' 해협 위 공중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다. 울돌목은 진도와 해남 간의 좁은 해협을 이루며 바다의 폭은 한강 너비 정도인 294m 내외다. 물길은 동양 최대 시속을 지닌 약 6m의 조수가 흐르며 젊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물 흐르는 소리가 크다. 거품이 일고 물이 용솟음쳐 배가 거스르기 힘든 곳이다. 케이블카에 타 울돌목의 경관을 마음껏 감상했다. 발밑 유리를 통해 울돌목의 신비로운 회오리 역시 볼 수 있었다. 다도해의 아름다운 낙조와 미려한 진도대교가 함께 빚어내는 환상적인 파노라마 뷰는 잊기 힘든 장관이었다. 운행 구간은 약 1km인데 하늘에서 바라본 해남의 경치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해남군은 영화 관광지로서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노력 중이다. 해남군과 코레일관광개발은 해남 시네마&별미 투어를 최근 선보였다. 영화 호프 테마거리를 비롯해 땅끝마을, 우수영관광지, 해상케이블카 등 관광지 코스와 미식 코스가 결합한 형태다. 영화 콘텐츠와 해남의 자연, 문화, 미식을 결합해 지역관광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획이다.
이틀 간의 해남 시네마 여행으로, 영화 호프와 명량을 다시 봤다. 영화관 스크린으로 볼 때는 대수롭지 않게 스쳐 보냈던 장면들이 투어를 소화하면서 뇌리에 깊게 박혔다. 영화를 오감으로 다시 느끼며 깊은 통찰과 재해석을 해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해남 시네마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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