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상품을 돈 주고 바로 사는 시대는 지났다. 무작위로 피규어가 들어있는 '랜덤박스'부터 일본식 캐릭터 제비뽑기인 '이치방쿠지', 번화가 곳곳에 자리한 인형·열쇠 뽑기방 등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확률형 상품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가는 엇갈린다. 적은 비용으로 스릴과 재미를 누리는 '소소한 유희'라는 옹호의 목소리와 불투명한 확률로 과도한 탕진을 유도하는 '도박성 소비'라는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뽑기 열풍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소소한 재미" vs "도박 판박이"
무작위성(Random)을 결합한 유희성 소비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최근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7.3%가 인형뽑기나 가챠(캡슐토이) 등 무작위 뽑기 상품을 실제로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관련 제품을 다수 판매하는 글로벌 아트토이 기업 팝마트(POPMART)의 국내 법인 팝마트코리아의 매출액도 2022년 60억원 수준에서 지난해 1255억원으로 급등했다.
유희성 소비를 즐기는 소비자들은 다양한 장점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일부 소비자들은 가로 상품을 구매하는 확정 소비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막연함과 불확실성'이 주는 스릴을 구매 요인으로 꼽았다. 용산구 소재 쇼핑몰에서 만난 서민혜 씨(23·여)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뽑기 상품이 많이 있어서 이곳을 자주 방문한다"며 "어려운 확률을 뚫고 원하는 상품이 딱 나왔을 때의 쾌감 때문에 끊기 힘들다"고 말했다.
불확실성 소비 자체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엔터테인먼트로 인식하는 시각도 구매 요인으로 지목됐다. 홍대입구역 인근의 한 피규어 매장에서 만난 김수빈 씨(23·여)는 "요즘 식비가 너무 올라서 점심 한 끼를 아끼면 뽑기를 두 번 정도 할 수 있다"며 "음식은 먹으면 사라지지만 이건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소장품이 나오니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서초구에 위치한 국제전자센터에서 방문한 서희우 군(14·남)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뽑기 얘기를 많이 한다"며 "좋은 거를 뽑으면 학교에 가져가서 자랑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적은 금액으로 일상 속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홍대입구역 인근의 한 인형뽑기 매장에서 만난 김현아 양(16·여)은 "인형뽑기에 하루 많아야 1만원 정도 쓰는데 요즘 다른 놀이 문화에 비하면 저렴하게 도파민을 채우는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대학생 박한영 씨(20·여) 역시 "처음 샀을 때 한 번에 원하는 게 걸렸던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며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보다 비교적 저렴하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국제전자상가에서 만난 서민영 씨(42·여)는 "사실 온라인으로 완제품을 사면 훨씬 싸게 살 수도 있지만 아이와 함께 찾는 키즈카페나 놀이동산 이용료라고 생각하면 그리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유희성 소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소비자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원하는 상품이 나올 때까지 연속 결제를 유도하는 구조가 슬롯머신 등 사행성 도박의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에서 응답자의 78.8%가 '뽑기 상품에 중독성이 있다'고 느꼈으며 46.7%는 '뽑기 행위가 도박에 가깝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이치방쿠지(제비뽑기)'를 자주 구매했다는 김희연 씨(28·여)는 "하나 둘 사다 보면 어느새 과소비로 이어진다"며 "가계부를 쓰다가 상상 이상으로 많은 돈을 쓴 걸 확인한 뒤 자제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대학생 이진호 씨(24·남)는 "1등상 피규어 당첨 확률이 너무 낮은데 사실 그 정도 금액이면 매장 바로 밑층이나 인터넷에서 돈을 조금 더 주고 완제품을 바로 사는 게 훨씬 이득이다"고 말했다.
직장인 이병수 씨(31·남)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긴 하지만 일단 가격이 너무 비싸 구경만 한다"며 "어린 학생들이 매장에서 네 다섯 개씩 뽑아가는 걸 보면 돈이 어디서 나는 건지 궁금하고 신기할 따름이고 가끔 저러다 도박에 중독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설명했다. 국제전자상가 관리인 김철민 씨(52·남·가명) 역시 "뽑기 한 번에 1만원, 2만원씩 하는데 어린 아이들이 와서 결제하는 모습을 보면 염려스럽긴 하다"며 "당첨 확률이 1%에 가까운 구조인데 이건 소비가 아니라 사행성 도박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무작위성 소비 현상이 현대인들의 스트레스 해소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사행성 중독으로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랜덤박스나 가챠 등은 소액으로 즉각적인 도파민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어 고물가 시대에 가성비 높은 '심리적 보상'으로 작동하고 있다"며 "다만 불투명한 확률 구조와 '한 번만 더'라는 심리를 자극하는 상술에 과도하게 노출될 경우 개인의 자율적 통제력을 잃고 사행성 중독으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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