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회식 자리에서 소주잔이 몇 순배는 돌았을 저녁 7시. 요즘 2030 세대는 그 시각에 술잔 대신 다른 걸 손에 쥔다. 바로 ‘왁뿌볼’과 키캡이다. NH농협은행이 지난해 상반기 결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30 세대 완구점 지출은 전년 대비 224% 증가했다. 반면 국세청 통계는 국내 주류 출고량이 2022년부터 3년 연속 내리막임을 보여준다. 술값 아까운 줄 아는 요즘 어른들은 장난감 ‘득템’에나 선뜻 지갑을 연다는 뜻이다.
2030 세대라면 퇴근하며 집 근처 편의점에 들르기는 필수다. 장바구니에는 맥주캔이나 소주병 대신 신상 디저트류를 담는다. 근래 가장 유행했던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상하이 버터떡, 봄동 비빔밥은 이미 잊힌 지 오래. 이제 대세는 먹는 ‘왁뿌볼’ 스타일 디저트다. 왁뿌볼은 ‘왁스 뿌시(부수)기 볼’의 줄임말로, 촉감 완구를 말한다.
술잔 대신 키캡
회식 말고 편의점
술을 아예 끊거나 최대한 적게 마시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술값으로 나갈 뻔했던 돈이 고스란히 장난감 가게와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다. 술에 취하는 대신 덕질에 취하는 어른이. 대체 왜 이들의 취향은 늙지 않는 걸까.
아이 같은 취미를 가진 어른을 ‘키덜트(Kidult)’라 부른다. ‘아이(Kid)’와 ‘성인(Adult)’을 더한 콩글리시 조어다. 순우리말로는 ‘어른이(어른+아이)’라고도 한다. 쓰는 말이 달라서 그렇지, 영미권에서도 비슷한 신조어를 여럿 쓴다. 일례로 ‘어덜트후드(Audult+Childhood)’가 있다.
‘키덜트(kidult)’란 단어,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서구권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이와 비슷한 표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건담 프라모델과 콘솔 게임 문화가 확산하던 때. 어른이 되어서도 장난감을 사 모으는 초기 키덜트 시장이 형성됐다.
야외 활동이 활발하던 이 시대 흐름에서 비껴나 있는 키덜트는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같은 시기 한국 키덜트 역시 소수 마니아가 방 안에서 조용히 혼자 즐기는, 다소 폐쇄적이고 철없는 취미를 가진 이들로 치부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인터넷이 보급되고 게임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캐릭터 소비가 조금씩 대중화할 기반이 마련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무선조종 자동차 모형(RC카), 직소 퍼즐, 서바이벌 게임 용품이 새로운 어른이 놀거리로 떠올랐다.
레고는 아예 성인 라인을 따로 내놓으며 이 흐름에 올라탔다. 어린이 메뉴의 상징이던 맥도날드 ‘해피밀’은 의도한 적도 없는데 어른들의 지갑도 노리기 시작했다. 특히 <해리 포터> 시리즈는 전 연령대를 겨냥해 마케팅할 정도로 판을 키웠다.
당시 키덜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내 안의 키덜트 지수’를 측정해 보는 테스트까지 만들어 지면에 실을 정도였다.
이때만 해도 키덜트는 지금처럼 ‘힙한 문화’가 아니었다.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피겨를 진열하는 모습을 두고, 다소 폐쇄적인 아웃사이더를 연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하면 나이 먹고 철없다는 시선까지 받던 취미였다. 이때 키덜트는 취향을 대놓고 밝히기 민망해했다.
술 대신 덕질에 취한 ‘어른이’
퇴근길 2030 멈춰 세운 굿즈
2010년대에는 키덜트 시장 국경이 무너졌다. 특정 국가,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었던 여러 캐릭터가 ‘글로벌 IP(지적재산권)’로 통합됐다. 포켓몬, 산리오, 레고, 디즈니, 마블 등 시리즈가 일상 소비문화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포켓몬이다. 1996년 게임으로 시작한 포켓몬은 2010년대를 거치며 몸집을 키웠다. 2024년 기준으로는 연간 라이선싱 매출 약 120억달러, 전 세계 IP 브랜드 순위 7위에 오를 정도로 성장했다.
산리오도 만만치 않다. 헬로키티를 앞세운 산리오는 연간 매출 84억달러로 글로벌 라이선싱 업계 톱10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50세를 훌쩍 넘긴 캐릭터가 여전히 백화점 진열대 중앙을 차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캐릭터 굿즈를 어린이에 국한해 파는 대신, 성인 소비층 공략에 적극 나선 덕분이다.
디즈니는 아예 체급이 다르다. 마블, 스타워즈부터 디즈니 프린세스, 픽사까지 수백개의 IP를 한 지붕 아래 거느린다. 극장 개봉작 하나는 곧바로 피겨·의류·테마파크‧굿즈로 확장되는 구조를 완성했다. 2010년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휩쓸 때마다, 그 열기는 고스란히 성인 팬들의 소장품 진열장으로 옮겨졌다.
글로벌 캐릭터 상품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곧 어른으로 성장했다. 레고와 포켓몬 등 컬래버레이션 제품군은 아예 18세 이상 권장으로 출시된다. 이는 애초에 어린 시절부터 포켓몬을 좋아하던 키덜트를 정조준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게임보이 시절 ‘가라, 피카츄’를 외치던 세대가, 이제 자기 돈으로 피겨를 사 모으는 어른이 된 셈이다.
이때부터 판도가 완전히 뒤집혔다. 과거 키덜트가 ‘어릴 적 추억을 다시 사는 어른’이었다면, 2010년대부터는 ‘취향을 증명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재정의됐다. 숨기던 취미가 이제는 자랑할 만한 정체성이 됐다. 키덜트는 변두리에 머물던 하위문화에서 주류 소비문화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2020년대 키덜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제 캐릭터 굿즈는 ‘사는 것’을 넘어 ‘줄 서서 쟁취하는 것’이 됐다. 가장 극적인 신호탄은 2022년 재출시한 ‘포켓몬빵’이었다. SPC삼립이 16년 만에 내놓은 포켓몬빵은 출시 일주일 만에 150만개, 두 달 만에 1400만개가 팔렸다.
RC카에서
포켓몬으로
입고 시간에 맞춰 편의점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반복됐다. 이런 오픈런을 ‘포켓몬런’이라 부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 RM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포켓몬빵 구매 인증샷과 ‘띠부띠부씰’ 수집 책자를 공개했다. 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RM은 여기에 포켓몬 캐릭터 스티커를 구하지 못해 “제발 더 팔아주세요”라고 썼다. 이 열풍이 단순 유행이 아니라 어엿한 팬덤 문화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 뒤를 ‘라부부(Labubu)’가 이었다. 2015년 홍콩 아티스트 카싱 룽이 만든 이 요정 캐릭터는 2019년 팝마트가 독점 라이선스를 얻어 상품화했다. 2023년 블랙핑크 리사가 SNS에 라부부 열쇠고리 사진을 올리면서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연쇄적으로 확산했다. 국내 리셀 플랫폼에서 라부부 거래액은 1년 새 7711% 폭증했다. 2만1000원짜리 인형이 16만3000원까지, 무려 676% 뛰어 되팔렸다.
그다음은 랜덤 뽑기, 즉 ‘가챠(Gotcha)’다. 블라인드 박스를 뜯는 순간의 떨림, 원하던 캐릭터가 나왔을 때의 희열, 실패했을 때의 아쉬움까지.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놀이가 된다. 기다란 대기 줄이 서는 유명 식당 근처에는 어김없이 가챠 숍이 들어섰다. 랜덤 박스 구매 욕구와 리셀 시장의 결합은, 2020년대 키덜트 소비를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게임으로 바꿔놨다.
최근까지도 키덜트는 ‘희소성’과 ‘인증’을 키워드로 움직이고 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한정판을 손에 넣기 위해 줄을 서고, 그 성취를 SNS에 인증하고, 되팔아 시세차익까지 노리는 것. 장난감 하나가 이제는 취향 증거이자, 재테크 수단이자, 뽐낼 수 있는 전리품이 됐다.
“나 이런 거 좋아하네. 몰랐어요. 하나만 더 해봐도 될까요? 쾌감이 있네요. 기분 좋게 부서지네요.” 배우 구교환이 유튜브 카메라 앞에서 왁뿌볼을 손으로 으깨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왁뿌볼은 ‘촉감 놀이’ 형태로 진화한 어른이 장난감이다. 손끝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는 감각에 매료된 1982년생 배우의 진심 어린 탄성. 이 숏폼 영상은 수만명 시청자에게 묘한 쾌감과 대리 만족을 선사했다.
키캡도 마찬가지. 책상 위 키보드 부속품에 불과했던 키캡이 어느새 가방에 달리기 시작했다. 요즘 2030 사이에서는 키캡을 열쇠고리로 매달고 다니며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딸깍딸깍 눌러본다. 인기 비결은 왁뿌볼과 결이 비슷하다. 반복적인 소리와 촉감이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이유에서 입소문을 탔다.
여기에 나만의 이름 머리글자 등을 넣고, 컬러와 장식을 고르는 등 개성을 표현하는 커스텀, DIY 욕구까지 작은 굿즈 하나로 동시에 채울 수 있다는 점이 키캡 인기 핵심 비결이다.
우리는 왜 키덜트, 혹은 어른이란 이름으로 장난감에 열광하게 된 걸까? 가장 밑바탕에 깔린 이유로는 보상 심리를 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 눈치를 보며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던 로봇과 인형을, 이제 경제력을 갖춘 성인이 되어 스스로 선물하기 시작했다.
희소성 기본
안정감은 덤
두번째 이유는 IP 진화다. 디즈니, 마블, 산리오 등 글로벌 브랜드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성인층 지갑을 열기 위해 아주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어른용 굿즈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 소재부터 디테일까지 격이 다른 상품들이 소장 욕구를 더욱 자극해 왔다.
세번째는 어린 시절 추억 소환이다. 어릴 적 TV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던 캐릭터 인형과 로봇을 다시 손에 쥐는 순간, 어른이는 잠시 그때로 시간을 되감을 수 있다. 또 순수했던 유년으로 돌아가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놀아본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캐릭터를 손에 쥐면, 집 밖에서 웅크렸던 몸을 이완하고 긴장감을 떨쳐내는 유희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다음으로는 불확실성을 꼽을 수 있다.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은 강력한 쾌감과 연결된다. 미스터리 박스를 뜯는 순간, 혹은 어떤 촉감인지 알 수 없는 왁뿌볼을 손에 쥐고 으깨기 직전 순간에는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설렘이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단순한 상품 소비보다는 경험 소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설령 원하는 아이템을 얻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굿즈를 살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지갑이 허락하는 한.
다섯번째는 감각의 확장을 통한 촉각적 쾌감이다. 요즘 SNS를 점령한 왁뿌볼이 대표 사례다. 왁뿌볼을 두 손으로 주물러 부수는 과정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진열하고 감상하는 데서 그쳤던 장난감이 손가락 끝으로 느끼는 촉각 경험 영역에 들어서게 됐다.
여섯번째로는 단순히 노는 데서 그치지 않고 투자의 영역으로 넘어간 ‘토이 테크’가 있다. 한정판으로 출시하는 ‘베어브릭’ 등 고가의 캐릭터 피겨, 혹은 특정 브랜드와 협업해 출시하는 제품은 즉각 프리미엄이 거듭 붙으며 거래된다. 2030 세대에게 장난감은 자신의 안목을 증명하는 수단인 동시에, 가치가 상승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똑똑한 자산이다.
이 같은 현상은 키덜트 문화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 제품의 희소성과 가치를 분석하는 전문 수집 문화가 그 안에 있는 덕분이다. 이제 어른이들은 장난감을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래 가치도 덤으로 얹어 구매한다.
이 여섯가지 이유 중 지금, 이 순간 키덜트 시장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이를 ‘즉각적 도파민’이라 짚는다.
유년 시절 향수부터 힐링까지
픽셀 단위 소비로 취향 증명
SNS를 점령한 왁뿌볼이 대표적 예다. 쫀득한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모양을 변형시키는 과정은 빠른 속도로 안정감을 준다. 왁뿌볼, 말랑이, 키캡은 복잡한 업무와 인간관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가장 쉽고 빠른 스트레스 해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장난감은 보는 것을 넘어, 몸으로 느끼는 경험 영역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장난감에 몰입하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통제 가능한 작은 세계에 대한 갈망이라고 분석한다. 현실 세계는 불확실하고 통제하기 어렵다. 삶은 내 마음대로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손안에 쥔 작은 왁뿌볼 하나만큼은 원하는 대로 주무거나 깨부술 수 있다. 우리는 이 작은 굿즈를 통제하는 주인이다.
‘디깅(Digging)’은 현대인의 새로운 자아 찾기 방식이다. 남들이 좋다는 것 대신, 내가 미칠 듯이 좋아하는 것에 깊게 파고듦으로써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키덜트 문화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가는 가장 솔직한 방식이란 뜻이다.
키덜트, 어른이는 더 이상 미성숙한 취미를 지닌 이를 일컫는 말에서 그치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꿈을 키우고 현실화하는 거대한 목표에 달려드는 데서 오는 피로를 느끼느니, 대신 왁뿌볼과 키캡을 구매하는 데 각자의 취향을 발산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간다.
또 이들은 하나의 취향과 정체성을 오래 붙들고 사는 것보다 짧고 강렬한 취향의 조각들을 그때그때 모으고 소비하며 ‘지금의 나’를 계속 업데이트하고자 한다. 그게 바로 ‘픽셀 라이프’고, 지금 키덜트들이 매일 행하는 부수고 뜯고 모으는 행위다. 결국, 키덜트의 소비는 취향을 증명하는 행위로 진화하며 주류 문화의 중심에 진입했다.
픽셀 라이프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트렌드 코리아 2026>을 통해 제시한 신조어다. 디지털 화면의 최소 단위인 ‘픽셀(pixel)’에서 착안했다. 삶과 소비를 작고 세밀한 단위로 분절해 짧은 시간 안에 다수의 경험을 소화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뜻한다. 작고 많고 짧은 소비 경험이 일상의 기본 패턴으로 자리 잡은 현상을 개념화한 용어다.
건담을 완성하던 손이 왁뿌볼을 부수는 손으로 바뀌었을 뿐, 어른이들이 작은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마음은 그대로다. 다만 그 세계가, 이제는 훨씬 더 잘게 쪼개져 있을 뿐이다.
즉각적 도파민
안목 증명 수단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이제는 철 좀 들라고.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철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남들의 시선보다 나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것, 작은 것에서 커다란 행복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어른의 기술일지 모른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자.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왁뿌볼이 건네는 위로를 기꺼이 받아들여도 좋다.
<younme@ilyosisa.co.kr>
Copyright ⓒ 일요시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