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97일 남았다. 청바지에 셔츠가 좋겠군. 좀 더 젊어 보일 테니. 머리는 짧게 스포티하게 잘라야겠고.
94일 남았다. 오래만의 만남이야. 얇은 재킷이 좋을까? 아무래도 품위가 있어야 하나? 월요일에 만나니 정중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겠지.
이제 88일이다. 90일 이후부터는 시간이 가지 않는다. 잠도 오지 않는다. 양 백 마리를 재우고, 다시 거꾸로 재운 양을 한 마리씩 깨우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꽤 일찍 저승에 도착해, 다시 인간계로 간다는 것이 선뜻 상상이 되지도 믿어지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집 떠난 한 마리 들짐승 같다. 반인반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치 깨진 거울에 비친 모습 같다. 내가 봐도 기준이 없는, 단지 생물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마치 늑대마저 버린 야생 인간 같은.
30일, 딱 한 달 후면, 인간계에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을 만난다. 딸아이 9살에 느닷없이 나는 이곳으로 떨어졌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목이 날아갔다. 눈 깜짝할 새 던져진 것이다. 숨이 끊기기 직전, 영혼을 애도 받을 틈도 없이, 바로 인간계에서 탈락했다. 말 그대로 사고다. 인간계의 생활은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다. 하지만 내 딸, 딸 만큼은 무척 보고 싶고 안타깝다. 남들만큼 예뻐하지도 못하고, 짧은 시간 그 아이와 보냈다. 갑자기 닥친 죽음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나에게 죽음은 예고 없이 왔다.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들짐승처럼.
그날, 딸과의 만남에 최종 의상이 결정됐다. 간수 말로는 죽었을 당시의 의상이 좋다는 의견이다. 간수 말은 꽤 설득력 있다. 시간이 흘러 멋지게 차려입은들, 딸이 알아보지 못하면 말짱 헛수고라는 것. 그렇게 차려 입어도 하나도 멋지지 않다는 것. 더불어 이곳에 사는 모두의 의견이었다. 두 세상의 시차로, 어느새 나는 폭삭 늙어버렸다. 결국 나는 간신히 버틸 정도의 노파에 불과했다. 삭아 녹아버릴 만큼.
서북쪽 간수가 방문을 열었다.
“그만 취침하게나. 이제 단 하루 남았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자야 할 걸세. 생각보다 인간계는 하루가 무진장 기네. 빨리 지칠 걸세. 단 몇 시간이라도 자 두는 게 좋아. 눈 감고 양 백 마리를 세어 보게. 그러다 보면 자네가 곧 양이 될 테니.”
간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지고 방문을 닫았다. 아직 내 눈은 별처럼 말똥말똥하다.
“양 아흔여덟 마리, 양 아흔아홉 마리···”
벌써 세 바퀴째 양 백 마리를 돌려보냈다. 양과 함께 나에게 주어진 이 특별한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잔뜩 계획만 세우다 꼬박 밤을 새웠다.
“똑똑. 박 선생, 준비는 끝났지?”
“대충, 뭐.”
“떨리나?”
“아니, 뭐 떨리기보다는···”
서북쪽 간수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나는 간수와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다시 돌아올 테지만 영영 떠나는 것처럼, 그동안의 미련과 후회가 뭉클하게 뭉쳐 지금 막 솟는 태양 같았다.
“다시 돌아오는 거 맞지?”
“왜 싫은가?”
“아니, 꼭 못 올 거 같은 느낌일세.”
“느낌일 뿐이야. 분명 돌아오네. 일주일, 저세상 기준으로 하루, 내일 밤이면 다시 자네는 이 침대에 누울 걸세. 다시 양 백 마리를 부르며.”
“고맙네.”
“고맙긴. 내 일을 하는 것뿐인데.”
인간계로 넘어가는 길은 짧았다. 아래로 뻗은 긴 은하수 다리를 건너면 끝이었다.
“준비됐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오게. 딸과 좋은 시간 보내고. 잊지 말게. 일주일 뒤, 자정 오 분 전에 이 은하수 다리 끝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서북쪽 간수가 점점 멀어졌다. 은하의 다리는 구름처럼 가볍고 푹신했다. 꼭 맨발로 따뜻한 솜이불을 밟는 듯했다.
세상을 건너는 기분이 이런 거군. 분명 밟았는데 밟지 않는 기분, 숨 쉬는데 숨 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겠군. 저세상이 이랬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인간계의 호흡을 완전히 잃어버렸어. 꼭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던 거 같아.
동남쪽 끝에 딸이 있다고 했지. 소녀였던 시간에 헤어져, 숙녀를 지나 이제 아이의 엄마가 됐겠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기억은 할까. 내가 죽던 날 마지막으로 내 손에 있던 그 선물 갖고 있으려나. 푸른 인형, 내 딸이 그 인형을 들고 있다면 좀 더 쉽게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무지 떨리는군. 양 백 마리 세다 보면 은하 끝에 도착한다고 했지? 양을 천천히 불러야 하나? 아님 좀 더 빨리 양을 달려오게 해야 하나? 종잡을 수 없군. 맞다. 잠들기 직전의 템포로 세면 된다고 했지. 하던 대로 양 백 마리를 부르면 되는데. 무진장 어렵군. 역시 생은 힘들어. 끝없이 인생의 템포를 조절해야 하는군. 저세상과 이 세상이 똑같아.
양 아흔여덟 마리, 양 아흔아홉 마리, 양 백··· 마리···.
여성경제신문 양선주 시인·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
zoo-mouse@hanmail.net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양선주 시인·작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하며 문단에 데뷔해 시집 <사팔뜨기> 를 출간했다. 건강 문제로 인한 긴 공백기 끝에 2025년 시집 <열렬한 심혈관> , 산문집 <시는 내 곁으로 와 눕고> (공저)를 펴내며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소설미학> 에서 동화, <월간문학> 에서 동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문학적 역량을 펼치고 있으며, 동화책과 동시집 발간을 앞두고 있다. 월간문학> 소설미학> 시는> 열렬한> 사팔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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