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빠르게 갈아치워지는 유행 속에서도 오래 남는 것들은 따로 있다. 눈에 띄지 않아도 묵묵히 이어진 시간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이를 만든다. 손끝으로 이어온 기술, 세대를 건너온 방식, 그리고 변함없이 지켜온 자리까지. 속도가 전부인 듯 보이는 시대일수록 오래된 것들이 지닌 힘은 더 또렷해진다.
EBS1 ‘한국기행’ 868편 ‘변하지 않아 좋아’는 그 지속의 힘을 차분하게 담아낸다. 화려함 대신 꾸준함을 선택한 사람들, 빠른 변화 바깥에서 자신만의 길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시간이 쌓인 자취를 보여준다. 소리 없이 이어진 노력과 고집이 어떻게 지금의 가치를 만들어냈는지, 그 과정을 세밀하게 짚어낸다.
■왕골 위에 눕힌 여름의 기억
한여름의 열기가 숨을 조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함이다. 전남 함평에서 이어져 온 왕골 돗자리는 그런 감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인공적인 냉기가 아닌 자연의 재료가 만들어낸 촉감은 몸을 천천히 식히며 오래 머문다. 수백 번의 손길로 엮인 결과물은 생활용품을 넘어 계절을 견디는 방식 그 자체다.
정일범 씨와 김용남 씨 부부는 다섯 세대에 걸쳐 이 일을 이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손에 익힌 기술은 세월이 흘러도 흔들리지 않았다. 왕골을 심고 거두는 일부터 껍질을 벗기고 말리는 과정까지, 모든 단계가 사람의 손을 거친다. 그 끝에서 완성된 돗자리는 자연과 시간이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찾는 이가 줄어들었다는 현실은 이 부부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종묘와 경복궁에 깔린 돗자리를 떠올릴 때마다, 생업을 넘어 이어져야 할 문화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 자부심은 손끝을 멈추지 않게 만든다.
서로를 의지하며 같은 일을 반복해온 부부의 시간은 돗자리의 씨줄과 날줄처럼 맞물려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깊이가 결과물에 그대로 스며든다. 왕골 위에 누운 여름의 기억은 그렇게 사람의 시간을 품은 채 남는다.
■고택에 깃든 삶의 품격
안동의 오래된 집 한 채에는 수백 년의 기운이 담겨 있다. 류효진 씨와 문정현 씨 부부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살아 있는 전통이었다.
매일 아침 마루를 닦고 마당을 쓸며 시작되는 하루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어온 삶의 방식이 담겨 있다. 집은 더 이상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제사 음식이 일상 식탁에 오르고, 손님들은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함께 나눈다.
27년 동안 한옥 체험 공간으로 문을 열어온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의 발걸음이 끊기지 않을 때 집은 계속 숨을 쉰다. 조상의 유산은 그렇게 현재와 연결되며 의미를 이어간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여유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오래된 방식에서만 나오는 안정감이 있다. 고택은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활의 결과다.
■쪽빛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이름
전남 나주의 명하마을은 물과 함께 살아온 터전이다. 이곳에서 쪽을 키우고 색을 만들어온 윤대중 씨 부부는 다섯 세대에 걸쳐 이어진 가업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집안의 특별함은 전승에 머물지 않는다.
여섯 명의 자녀가 모두 이 일을 이어가겠다고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풍경이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이 됐다. 새벽 이슬이 남아 있는 시간에 쪽을 거두고, 발효를 기다리며 색을 완성하는 과정은 결코 빠르지 않다. 그 느림 속에서 가족은 함께 시간을 쌓는다.
쪽빛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 번의 담금과 기다림을 거쳐야 비로소 깊은 색이 나온다. 그 과정은 가족의 삶과 닮아 있다. 서로의 손을 보태며 이어온 시간은 색보다 더 짙은 의미를 남긴다.
젊은 세대가 선택한 길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빠른 변화 속에서도 오래된 방식을 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눈앞의 효율보다 오래 남는 가치를 선택한 결과다.
■한 그릇에 담긴 세월의 무게
대구의 오래된 평양냉면집은 한여름에만 문을 연다. 1905년 평양에서 시작된 이 가게는 전쟁을 지나 부산을 거쳐 대구에 자리 잡았다. 네 세대를 이어온 맛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방문진 씨 부부는 아버지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 음식을 만든다. 국물의 간을 맞추는 일부터 면을 삶는 시간까지, 모든 과정이 몸에 밴 기억으로 이어진다. 손님들은 그 맛을 기억하고 다시 찾아온다.
익산 황등의 비빈밥 역시 긴 시간을 견뎌왔다. 석공들이 빠르게 먹고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시작된 음식은 이제 지역을 대표하는 별미가 됐다. 주방에서 비벼 나오는 방식은 지금도 그대로다.
이종식 씨 부부는 세대를 이어온 조리법을 지키며 같은 마음을 이어간다. 그 마음이 맛으로 남아 오늘까지 이어진다.
■가위 끝에 남은 인생의 흔적
대전 소제동의 오래된 골목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이발소가 있다. 1960년대 문을 연 이곳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이종완 씨는 열다섯 살에 가위를 잡은 이후 지금까지 그 일을 이어왔다.
낡은 의자와 거울, 그리고 벽에 걸린 오래된 물건들은 그가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다. 단골손님들은 머리를 자르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아내 송지철 씨는 60년 넘게 남편 곁을 지켜왔다. 매일 점심 도시락을 챙기고 일을 돕는 일상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삶은 가게 안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재개발을 앞둔 상황에서도 이발소는 여전히 문을 연다.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공간 자체보다 그 안에 남은 온기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온 시간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빠르게 바뀌는 세상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사람의 손에서 이어진 시간이다. 변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가치가 있다. '한국기행' 868편 '변하지 않아 좋아'는 그 오래된 자리를 지켜온 이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준을 조용히 보여준다. 오는 3일부터 7일까지 오후 9시 35분 EBS1에서 방송.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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