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여성 최초 노벨평화상…5천만 그루 나무 심은 '그린벨트 운동' 창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해 '숲 파괴' 맞서…"후손에게 빌려 쓰는 지구" 유산 남겨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2004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 한 인물이 아프리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단상에 올랐다.
주인공은 케냐의 환경운동가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인 왕가리 마타이였다.
그는 서구식 정장 대신 모국과 아프리카 여성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밝은 오렌지색의 아프리카 전통 의상 '부부 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노벨위원회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민주주의, 평화를 위한 공헌"을 수상자 선정 이유라고 밝혔다. 환경 운동가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노벨상 100여년 역사상 처음이었다.
"우리가 환경을 파괴하면 자원은 고갈되고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게 된다. 평화는 환경을 보호하고 가꾸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마타이의 단호하고 통찰력 있는 외침은 전 세계에 커다란 울림을 전했다.
마타이는 1940년 케냐 중부 니에리 지역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빠의 권유와 지원으로 학교에 입학해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1960년 미국의 아프리카 유학생 지원 프로그램 '케네디 에어리프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생물학 학사를 거쳐 석사 학위까지 마친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1971년 나이로비대학교에서 동아프리카·중앙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수의해부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수의해부학과장을 지냈다.
1970년대 당시 케냐 국가여성위원회(NCWK)에서 활동하던 마타이는 고국의 심각한 환경 파괴 현장을 목격했다.
무분별한 상업적 벌목과 개간으로 울창했던 숲이 사라지면서 강물은 말라붙었고, 토양은 황폐해져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생태계 파괴는 곧바로 농작물 수확량 감소로 이어져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어린 시절 그는 숲과 개울이 풍부한 자연 속에서 자랐다. 숲에서는 장작을 구할 수 있었고, 계곡의 물은 깨끗했다. 농사는 비옥한 토양 덕분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상업적 농업의 확대로 숲의 면적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대규모 농장과 목재 산업이 확산하면서 전통적인 생태 환경이 무너진 것이다.
마타이는 훗날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숲과 강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마타이는 이 문제들의 공통된 원인이 숲의 파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1977년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에 나이로비 외곽에 7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훗날 전 세계적인 생태 운동으로 자리매김한 '그린벨트 운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단순히 묘목을 심는 행위를 넘어, 자연이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도록 돕는 게 목표였다.
이 그린벨트 운동은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현재까지 5천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깊은 뿌리를 내리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마타이는 환경 운동을 '여성 인권 신장'과 '빈곤 퇴치'라는 사회적 의제로 격상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당시 케냐의 농촌 여성들은 가족을 위한 땔감과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매일 수 킬로미터를 걸어야만 했다. 숲이 파괴될수록 여성들의 가사 노동 강도는 세졌고, 이는 교육 기회 박탈과 빈곤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마타이는 마을 여성들에게 묘목을 나눠주고, 이를 심고 가꾸어 나무를 살릴 때마다 소정의 임금을 지급하는 실용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학력이 없는 여성들도 나무를 기를 수 있도록 가르치며 이들을 '수료증 없는 숲 지킴이'라고 불렀다.
결과적으로 숲이 우거지면서 땔감과 깨끗한 물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됐고, 여성들은 스스로 돈을 벌며 경제적 자립을 이뤄냈다. 여성들은 지역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했다.
물론 마타이의 여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숲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부패한 정치권력의 탐욕과 밀접하게 닿아 있음을 깨닫고, 다니엘 아랍 모이 독재 정권의 무분별한 국유림 매각과 공원 개발에 맞섰다.
마타이는 1989년 나이로비 시민들의 휴식처인 '우후루 공원'에 60층짜리 고층 빌딩과 여당 본부를 세우려는 정부의 계획에 맞서 대대적인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그가 국제 환경단체와 언론을 통해 공론화하자 결국 이 프로젝트는 취소됐다.
마타이는 1992년에는 나이로비 외곽 '카루라 숲' 민영화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곤봉에 맞아 의식을 잃기도 했다.
정부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고 투옥되며 숱한 폭행과 살해 위협을 받았지만, 그의 굳은 신념은 절대 꺾이지 않았다.
이처럼 부당한 권력에 맞서 나무를 지켜낸 그의 투쟁은 자연스럽게 케냐의 민주화 운동과 반독재 투쟁으로 이어졌다.
우후루 공원과 카루라 숲을 지켜낸 그는 2002년 케냐에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므와이 키바키 정부에서 환경부 차관을 지내며 산림 복원 정책과 환경 교육 확대에 힘썼다.
유엔 등 국제회의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강조하며,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 발전과 환경 보호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타이는 2011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지구는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서 빌려 쓰는 것"이라는 진리를 실천으로 증명했다.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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