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전세라 기자】거대한 폭력은 때론 작은 오해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내가 본 것만을 진실이라 믿으며, 멀리 있는 타인의 삶을 나와 무관한 일로 여기는 순간 오해는 편견이 되죠. 그리고 그러한 편견은 배제와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요.
예술은 우리가 당연하게 바라본 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미처 보지 못했던 존재와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게 함으로써 익숙한 편견과 오해에 머무르지 않게 하죠.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영화의 시선을 새롭게 확장하는 영화제부터 관객의 눈과 상상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 민주화 운동 시기의 서울과 내전 속 시리아를 한 무대에 펼쳐 놓은 공연까지. 이번 주 [TN 위클리 컬처]에서는 익숙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 하나의 장면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목소리와 삶을 발견하게 하는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이번 주도 어김없이 ‘무엇을 볼까’,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엄선한 문화예술 소식을 지금 바로 전해드립니다.
영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하다
‘벡델 테스트’에 대해 아시나요? 벡델 테스트는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두 명 이상 등장하는지,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지’ 등 기준을 통해 작품 속 여성 재현을 살펴보는 지표인데요. 그동안 많은 작품이 남성 중심의 시선과 서사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왔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대학 시절 한 교양 수업에서 벡델 테스트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후 매체 속 여성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죠. 이처럼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지워지거나 주변으로 밀려났던 여성의 삶과 목소리를 꾸준히 조명해 온 영화제가 다시 열리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올해로 28회를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지난해에 이어 ‘F를 상상하다’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올해의 키워드로 ‘Flicker(깜박임)’를 제시했는데요. 촬영 과정에서 기술적 오류로 여겨지는 플리커처럼 완벽함을 요구하는 시대가 제거하려 했던 흔들림과 실패를 오히려 ‘살아 있음’의 신호로 바라보죠.
개막작은 이러한 영화제의 방향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문을 여는 작품은 사라 이스하크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 <정거장> 인데요. 오랜 분쟁 속에서도 여성들이 스스로 만든 공간을 지키며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는 여성들의 회복력과 연대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여성의 경험을 새로운 시선으로 기록해 온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죠. 정거장>
올해 특별전은 기존의 여성영화를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합니다. 그동안 ‘악녀’라고 불려 온 여성들의 욕망과 행동, 몸의 주체성을 새롭게 읽어내거나 일본 여성감독들이 바라본 여성의 삶과 정체성을 살펴보는 등 익숙한 여성 재현에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이번 영화제에서는 여성운동과 영화운동이 만났던 현장에서 제작된 작품들을 되짚으며 약 40년 만에 디지털로 복원된 <순영이의 사랑이야기> 도 세계 최초로 만나볼 수 있죠. 순영이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홍보대사인 시우프스타에는 이연 배우가 함께합니다. 이연 배우는 작품마다 자신만의 색깔과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주목받고 있는데요. 영화제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며 새로운 행보를 보여줄 이연 배우의 활약이 더욱 기대됩니다.
익숙한 영화의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의 삶과 목소리, 실패와 흔들림이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오는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와 메가박스 신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시 이강소 개인전 <일어나고 사라지는>일어나고>
작품의 완성은 관객의 눈
맑은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나에게 익숙한 무언가를 떠올리곤 합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구름의 형상에서 동물이나 사람의 얼굴처럼 실제로는 연관성이 없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는데요. 이를 심리학에서는 불분명한 자극에서 익숙한 형태나 의미를 찾아내는 ‘변상증’이라고 합니다. 위험이나 친숙한 대상을 빠르게 알아보기 위해 발달한 인간의 인지적 특성으로 설명되기도 하죠. 이처럼 보는 사람의 경험과 상상을 통해 비로소 형태가 완성되는 순간을 회화로 옮겨온 작가가 있습니다.
이강소 작가는 서너 번의 선과 붓질만으로 화면 위에 오리와 배, 사슴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을 만들어 내는데요. 작가는 직접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기고, 그 흔적을 실제 이미지로 완성하는 역할을 관객의 눈과 상상에 맡깁니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오리를 발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하나의 정답보다 바라보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게 하죠.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강소가 롯데뮤지엄을 찾아왔는데요.
최근 일본 그래픽 아티스트 베르디의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 <아이 빌리브 인 미> 를 마무리한 롯데뮤지엄이 새롭게 선보이는 전시는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 입니다. 이강소는 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중심에서 회화와 조각·설치·퍼포먼스·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인데요. 작품을 행위와 시공간이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 확장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죠. 이번 전시에서는 총 150여 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초기 실험미술부터 최근 작업까지 반세기가 넘는 예술세계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요. 이강소:> 아이>
이번 전시는 세계 미술계의 시선이 서울로 향하는 시기에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을 조명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롯데뮤지엄은 국제 아트페어인 프리즈 개최로 국내외 미술 관계자와 관람객이 서울을 찾는 시기를 맞아, 한국 현대미술의 독자적인 흐름을 만들어 온 이강소의 작업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살펴보고자 했는데요. 앞서 신진 작가와 동시대 대중문화를 소개해 온 데 이어 이번에는 한국 실험미술의 역사를 이끌어 온 작가를 통해 한국 미술의 폭넓은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50여 점의 조각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데요.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조각 작업을 통해 이강소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실재하는 작품과 이미지가 교차하는 공간 구성과 미디어를 활용한 연출을 더해 작품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감각으로 일어나는 경험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죠.
사라지는 흔적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예술의 의미를 만나는 전시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 은 오는 21일부터 11월 1일까지 서울시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 위치한 롯데뮤지엄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강소:>
공연 더 헬멧
두 개의 세상, 하나의 공통점
전쟁 소식으로 국제사회가 시끄러운 요즘입니다. 전쟁은 비단 당사국뿐 아니라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는데요. 우리가 서울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한편, 어딘가에서는 폭탄과 총성 속에서 당장 내일의 삶조차 예측할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이 이어지고 있죠. 이처럼 우리가 외면한 채 지나쳐 온 폭력의 현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무대에 불러낸 연극이 관객을 찾아왔습니다.
연극 <더 헬멧> 은 독특한 연극적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무대를 ‘스몰 룸’과 ‘빅 룸’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는데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민주화 운동 시기의 서울을, 다른 한쪽에서는 시리아 내전 속 폐허가 된 도시를 그리죠. 이 연극에 참여하는 관객은 자신이 선택한 공간과 시선에 따라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더>
서울과 시리아.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도시를 하나의 무대에 올려놓을 때 비로소 공통점이 드러나는데요. 서로 다른 역사와 지역에서 출발했지만 반복되는 국가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닮아 있습니다. 작품은 멀게만 느껴졌던 타인의 고통을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겪는 현실로 바라보게 하죠.
시나리오에 맞춰 연출을 완성해 가는 기존의 연극 문법과 달리 이번 작품은 ‘하나의 공간에 두 개의 무대’라는 형식에 맞춰 이야기가 개발됐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한쪽 공간에서 완성되지 않았던 장면과 인물의 감정은 다른 공간의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데요. 서로 다른 관점이 하나의 사건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바꾸면서 우리가 보고 믿는 것이 과연 진실의 전부인지 질문하게 합니다.
<더 헬멧> 의 김태형 연출은 작품을 두고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 중 하나”라며 “의미와 형식 모든 면에서 자신 있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는데요. 2017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 온 작품인 만큼 기존 배우들과 새롭게 합류한 배우들이 만들어 낼 조화에도 자연스럽게 기대가 모입니다. 더>
폭력 앞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신념과 존엄을 되묻는 연극 <더 헬멧> 은 오는 10월 11일까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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