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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 2026-07-31 15:49:57 신고

▲ 마르셀 뒤샹, 3개의 표준 정지 장치(3 stoppages étalon), 1913-1914
▲ 마르셀 뒤샹, 3개의 표준 정지 장치(3 stoppages étalon), 1913-1914


[문화매거진=구씨 작가] 1913년, 마르셀 뒤샹Henri-Robert-Marcel Duchamp은 1미터 길이의 실 세 가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공기 저항과 중력에 의해 불규칙하게 구부러진 실의 궤적은 원래의 단단한 1미터와는 다른 형태를 만들었다. 뒤샹은 바닥에 고정된 실의 모양을 따라 세 개의 나무 자를 깎았다. ‘3개의 표준 정지장치(3 stoppages étalon)’라 불린 이 작업은 미터법이라는 과학적·기술적 기준을 비틀고,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결과를 작가의 선택을 통해 새로운 단위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뒤샹은 이렇게 만든 자들을 상자 안에 정성스레 담아 보관함으로써 우연의 궤적조차 하나의 단단한 표준이 될 수 있음을 시각화했다. 변형된 세 개의 자는 절대적이라 믿었던 규격이 실은 약속된 관습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뒤샹이 작업의 본질과 개념을 정립하는 쪽에 집중했다면, 지금의 작가는 작업을 둘러싼 환경 전반을 계속해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개인전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공간 전체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구축해야 하고, 작업에 쓰이는 매체 역시 비디오, 설치, 사운드 등으로 다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전시장 벽면에 붙는 레터링의 서체나 크기, 서문이 읽히는 방식, 공간에 흐르는 사운드의 층위, 방명록의 형태까지 연출의 영역에 들어온다. 

창작자는 이제 순수한 작품 제작을 넘어 전시장을 구성하는 세밀한 요소들까지 직접 지휘해야 하는 일종의 연출가적 중압감을 마주하게 된다. 이 압박은 단순히 할 일이 늘었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이 작업이고 무엇이 작업을 둘러싼 장치인지, 그 경계를 작가 스스로 매번 다시 그어야 한다는 데서 온다. 나아가 전시가 끝난 뒤 개인 웹사이트나 디지털 아카이브에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기록하고 보여줄 것인가 하는 문제도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기술을 단순히 편리한 연출 수단으로만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기술은 메시지를 옮기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감각과 경험의 방식 자체를 형성하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영상 툴이 제공하는 기본 해상도나 24·60fps 같은 프레임 레이트, 사운드 프로그램의 이퀄라이저 설정이나 음향 템플릿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다. 이미 효율성과 표준화라는 목적에 맞춰 다듬어진 기본값(Default)에 가깝다. 

작가가 이 다듬어진 매끈함에 익숙해질수록, 정작 보여주고자 했던 작업 고유의 결이나 개성은 기술의 매끄러움 뒤로 쉽게 마모되곤 한다. 영상의 매끄러운 렌더링 방식이나 장비의 표준 재생 설정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스피커가 내는 전형적인 음역대에 맞춰 소리를 배치할 때 작업은 이미 준비된 기계적 규격에 머물게 된다. 문제는 이 규격들이 대개 불편함 없이, 심지어 배려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기본값은 사용자가 판단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애초에 그것을 의심할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렇게 편의는 조용히 판단을 대신하고, 작가는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있다는 감각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영상의 상영 방식과 디스플레이 장치를 고르고, 공간의 잔향이나 스피커의 지향성을 조정하며, 웹 인터페이스를 정하는 과정은 정해진 기술을 잘 써먹는 일 이상이어야 한다. 매체와 기기가 지닌 고유한 작동 방식, 그리고 그것이 관객의 감각을 통제하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되짚어 보는 일이다. 기계가 보장하는 매끄러운 표면 대신, 오프라인 공간과 매체가 마찰하며 생겨나는 틈새나 기술적 한계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기기와 소프트웨어가 제시하는 표준을 그대로 따르는 일에 의문을 던지고, 디지털 영상의 픽셀 미끄러짐이나 사운드 설치 시 공간의 부딪힘에서 발생하는 뜻밖의 소음들을 작업 안으로 끌어오는 일-이는 떨어진 실의 곡선을 자로 삼았던 뒤샹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배제할지 결정하는 그 선택의 과정 자체가, 이제는 작업을 만드는 과정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 선택들이 작가 고유의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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