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단위가 잘못 표기된 것이 아니었다. 3조 8,347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로 개인 투자자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수주 계약이, 계약 종료를 단 이틀 앞두고 '973만 원'이라는 허망한 숫자로 바뀌어 돌아왔다.
국내 이차전지 대표 소재 기업 엘앤에프가 테슬라와의 공급계약 정정 공시로 자본시장에 던진 충격파다.
금융감독원 자본시장특별사법경찰(특사경)이 지난 27일 한국거래소를 압수수색하며 본격 수사에 나섰다. 수사의 핵심은 명확하다. 공시 작성의 적정성을 넘어, 대형 악재성 정정 공시가 발표되기 직전에 단행된 회사의 '1,281억 원 규모 자사주 처분' 과정에 위법이 있었는지 여부다.
엘앤에프 측은 28일 "2024년 말부터 장기간 준비해 온 정상적인 자금조달 계획의 일환"이라며, 악재를 미리 인지하고 손실을 회피하려 했다는 '선행 매매'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과 투자자들이 느끼는 허탈함과 분노는 단편적인 해명으로 달래기 어렵다.
이 사태는 단순히 한 기업의 영업 실패나 공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우리 자본시장의 치명적인 구조적 맹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첫째, '정보의 비대칭'이 불러온 불공정성이다.
계약 이행률이 사실상 0%에 수렴하는 동안 시장과 개인 투자자들은 아무런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사이 회사는 자사주 100만 주를 처분해 대규모 자금을 확보했고, 정정 공시가 나온 이튿날 주가가 10%가량 급락하면서 그 피해는 오롯이 일반 투자자들에게 전가되었다. 중요 정보가 기업 내부자들에게만 독점되고, 정작 시장에는 '대형 악재'가 폭탄처럼 터지는 왜곡된 구조가 또다시 반복된 것이다.
둘째, '수주 대박' 공시의 신뢰성 실추다.
K-배터리와 이차전지 열풍 속에서 대규모 공급계약 공시는 주가를 부양하는 가장 강력한 재료였다.
하지만 수천억, 수조 원대 수주 공시를 띄워놓고 계약 종료 직전에 슬그머니 "물량이 감축되었다"며 판을 뒤엎는 행태가 용인된다면, 기업 공시는 투자 판단의 '이정표'가 아니라 투자자를 현혹하는 '시장 교란 장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기업 공시는 자본시장의 신뢰를 떠받치는 최후의 보루이자 투자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번 특사경 수사는 개별 기업의 혐의 입증이라는 단편적 목적을 넘어서야 한다. 기업이 계약 변경 사실을 정확히 언제 인지했는지, 그리고 이를 시장에 알리기까지 왜 이토록 긴 시차가 발생했는지를 철저히 가려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아가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 역시 대규모 수주 공시 이후의 이행 경과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감시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대형 호재성 공시만 발표한 채 이행 과정은 까마득히 방치하는 불합리한 관행을 뿌리 뽑지 못한다면, 한국 증시를 향한 투자자들의 외면과 불신은 결코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다.
김창권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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