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MIA 작가] 그림책 만들기 강의를 하다 보면 이야기를 쓰고 어울리는 장면을 그리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그림을 압도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예를 들어 ‘나는 그녀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라는 문장을 쓰고 해당 장면을 그릴 때 ‘나’를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상인 ‘그녀’를 그리는 경우가 그렇다. 그림이나 시각적인 장면으로 이야기를 떠올리는 데 익숙하지 않으면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많다.
이럴 때 나는 일부러 과감한 제안을 한다. 예를 들어 작은 서점을 그리고 ‘나는 그녀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라는 같은 문장을 넣어 보자는 식이다. 이 하나의 제안을 바탕으로, 수강생은 수십 가지의 변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깨닫는다. 도로를 그려도, 은행을 그려도, 깊은 산 속이나 바다를 그려도 해당 문장을 넣으면 그림책을 보는 독자는 보여주는 대로, 혹은 보여주는 범위를 넘어 자기만의 경험으로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건 그림책 작법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꽤 엄청난 비밀이자 전략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한 번은 감추는 시도를 하는 데 있다. 그러니까 우선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그림을 이야기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순서로 작업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포기한 다음에야, 그림이 가진 본질적인 역할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 정확히는 그림의 역할에 기대어 우리의 이야기가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그림책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바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다. 이는 그림의 역할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사실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그림책 사례는 많지만,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사례는 에바 린드스트룀의 그림책 ‘모두 가버리고’다.
이 그림책에는 네 명의 주인공, ‘티티, 레오, 밀란, 프랑크’가 등장한다. 프랑크는 티티, 레오, 밀란과 같이 놀고 싶지만 어쩐지 계속 혼자 있다. 혼자 집에 가서 눈물로 마멀레이드를 만드는 청승을 부리는 동안 나머지 세 친구는 프랑크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손을 건넨다.
줄거리는 이처럼 간단하지만, 작가는 이들 사이에 놓인 긴장과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시선을 일관적으로 활용한다. 가령 프랑크가 티티, 레오, 밀란이 함께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을 보여주다가 다음 장에서는 티티, 레오, 밀란은 셋이서 같이 있으면서 혼자 있는 프랑크를 쳐다보는 장면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때 정작 프랑크는 다른 친구들 셋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 묘미이다. 이들의 시선은 계속해서 어긋나며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어서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진다. 이 그림책은 그 감정을 중단하지 않고 그들이 화합할 때까지 지속해 나간 끝에 결실을 맺는다.
이 책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결코 인지할 수 없었던 타인의 다정한 시선을 가늠해 볼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작가는 그저 상황을 있는 그대로 그려 보여주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라는, 어떻게 보면 별것 없고 아주 쉬운 원칙이 막상 실전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너무 당연해서'일지 모른다. 또는 텅 빈 백지는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라, 우리는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방법은 있다. 바로 이야기를 주장하기 전에 현존하는 무엇부터 그려 보는 것이다. 서점, 창문, 자연 등 무엇이라도. 그림은 이미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야기는 기대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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