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단 작가] 서사. 일상에서 많이 쓰이지만 정의하기에 애매한 단어 중 하나다. 서사는 이야기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구조를 갖추지 않은 단순한 문장의 나열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체계적인 흐름에 따라 전개되어야 이야기 안에 다양한 요소가 결합될 수 있다. 서사가 빠진 문장의 나열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서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선형서사와 비선형서사. 화자에게 벌어진 사건을 시간의 순서대로 쫓아가며 감정에 몰입하는 선형서사와, 사건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영향을 끼치는 비선형서사가 있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회고나 예측에 대한 장면들이 비선형서사에 해당한다.
창작은 선형서사를 취한다. 아티스트는 미래시점에서 과거로 돌아와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영화처럼 시공간을 오가며 역작을 만들어내는게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면 흥미롭겠지만 말이다. 인간이 만드는 이상, 작품은 시간과 시간의 사이에 틈을 내려 순리대로 완성된다.
그렇지만 창작이 반드시 동시성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2주 이내에 받은 생생한 영감만 창작으로 쓰인다는 법은 없다. 충분히 다듬어 먼 미래에 내보일 수도 있다. 취향을 파는 것과 수집한 것을 보존하는 덕목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모쪼록 나를 포함해 창작의 삶을 사는 모두가 잘 살고, 닦고, 건네기를.
서사를 따라가며 창작자의 내면에 변화된 무늬를 관찰하는 것 역시 몰입하고 기억하는 장치가 된다. 이야기가 소거된 지점에 고통의 갈무리나 성장에 감동하기도하고 확장되는 파형에 공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삶을 반추하고 방향을 점검한다. 보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감응하려면 서사가 도움이 된다.
7월 초 뮤지엄 산에 방문해 만난 제임스 터렐의 작품들이 그랬다. 30분 가까이 이어진 도슨트를 통해 암흑과 빛, 착시 속을 거치며 작가의 삶과 생각에 착안해 만들어진 작품의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가 어떤 시간들을 지나왔는지, 무엇을 조명해 표현했는지 들으며 관람했다. 각각의 공간을 통과하며 작품 뒤에 있던 제임스 터렐이라는 인물의 입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의 서사가 들리는 작품들이었다. 촬영이 불가해서 사진은 남기지 않았지만, 평소 체험형 전시를 즐기는 편이 아닌 내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창작의 순간 그 즉시 방대한 서사를 다 담긴 어렵지만 보이는 순간에는 잘 정리된 서사가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 몸소 느낀 전시였다.
아직 모든 입체가 완성되지 못 하고 어리숙함이 한껏 담긴 젊음은 불안하고, 거칠며, 덧없이 짧다고들 한다. 그래서 사랑스러우며 어렵다. 단도 공감한다. 주저되는 순간에도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건, 앞서 자신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남긴 자적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되도록 자주 동하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최근 동서양의 철학과 문체가 결합된 작품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것에 대해 담소를 나눈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대표격인 작가로 이배가 빠질 수 없다. 이배 작가의 회화와 조각은 고요함을 물성으로 치환한 것 같다. 조용함을 넘어서 고요하다. 잡다한 공해를 축축해질 정도로 받아낸 현대인에게, 작품은 소음을 건조시키고 안전을 감각하게 한다. 축적된 피로가 감상 사이사이 여과된다.
이배는 나무를 태워 만들어진 숯과 재를 재료로 차용한다. 검정에 생명력과 시간의 무게를 담아낸 작가는 유서깊은 전통과 함께 현대미술의 구조적 미학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Issu du feu’ 시리즈에서는 특유의 미니멀한 느낌과 함께 감각적인 숯과 먹의 배치를 볼 수 있고, ‘Brushstroke’ 시리즈는 깊이와 고요함이라는 개념이 움직인다면 딱 이러한 자적을 남기지 않을까 하는 상상으로 인도한다.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산은 첫 방문이다. 안도 타다오의 설계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알려져 이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다. 광활한 자연속에 폭 안겨있는 공간으로, 사계절 달라질 모습이 기대된다. 7월은 초록이 만연했고 10월이면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을 것 이다. 일상을 제치고 어딘가 안기고 싶을 때 뮤지엄 산으로 대피하면 힘을 받아갈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도심을 벗어나 이런 명소도 방문해 한국은 인적자원의 축복만 넘치는게 아니라, 주어진 자연환경 안에서 조화롭게 가꾸며 산다는 것도 알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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