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코리아=김관수 기자] ‘덕질’,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 그 어원인 ‘오타쿠’들을 도쿠시마현 곳곳에서 만났다. 코끝을 향기롭게 해주는 나무, 블루 감성으로 두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쪽 염색, 쌀의 미학을 입안 가득 전해주는 전통주까지 이어진 진정 일본스러운 덕질의 현장들은 일본 소도시여행의 만족도를 몇 배쯤 높여놓았다.
시코쿠 도쿠시마현
도쿠시마현은 일본을 형성하고 있는 4개의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섬 시코쿠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 세계 3대 조류 중 하나로 꼽히는 ‘나루토 우즈시오(소용돌이)’와 도쿠시마현 서부의 특산 식물인 시라쿠치카즈라(덩굴 식물)로 만들어진 아주 특별한 다리 ‘이야의 가즈라바시’, 전통 예술인 ‘아와오도리’가 도쿠시마현을 대표하는 이름들이다.
특례시, 중핵시, 정령지정도시가 단 하나도 없는 일본의 유일한 현이라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현재의 도쿠시마현은 작은 시골 지역이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와 근세에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의 중심에 있었던 도쿠시마를 만날 수 있다.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내란의 시기로 불리는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의 다이묘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는 현재의 오사카부에 진출하여 당당히 일본의 정권을 거머쥐었다. 그의 동생 미요시 짓큐(三好実休)는 무장이지만 도쿠시마를 문화의 중심지로 이끌었고, 전통 교역품인 쪽(藍)은 도쿠시마에 상당한 부와 함께 상업 도시라는 타이틀을 안기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진 이러한 정치적, 문화적, 상업적 부흥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도쿠시마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오타쿠들의 고품격 덕질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닐까.
짧은 일정에 아쉽게 다음 여행으로 남겨두고 와야 했던 위시리스트가 있다. 아와오도리 공연, 나루토 해협 언덕 위 오쓰카 미술관, ‘귀멸의 칼날’ 등을 제작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탑티어 유포테이블(ufotable) 경험까지 추가한다면 도쿠시마 여행은 일본 소도시여행의 소소한 매력은 물론, 숨어 있던 덕질 본능이 깨어나는 강렬한 문화적 경험까지도 맛볼 수 있는 예술적 여행으로 기록될 것이다.
덕도에서의 덕질 베스트3
1. 나무랑 놀자! 도쿠시마 나무장난감박물관
“나무로 만든 장난감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 이름에서 먼저 스물스물 호기심이 발동되고,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일본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 어떤 전시가 펼쳐질지, 어떤 프로그램들이 진행될지 그 현실적 모습이 차마 상상되지 않았던 나무장난감박물관은 꼭 가서 보고 경험해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기분 좋은 미지의 세계였다.
도쿠시마에 나무장난감박물관이 설립된 이유는 뭘까? 도쿠시마현은 전체 면적의 약 76% 정도가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을 만큼 풍부한 산림 자원을 자랑한다. 일본 내에서도 매우 높은 산림 비율로 삼나무(스기)와 편백나무(히노끼)의 비중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삼나무는 일본을 대표하는 침엽수로 건축, 가구 등의 재료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고, 편백나무는 고급스러운 질감과 특유의 향으로 한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도쿠시마현은 임업을 통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이러한 지역 자원을 활용한 사업을 중점적으로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나무를 직접 만지고 경험하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목육(木育)’ 사업을 펼치고 있다.
나무장난감박물관이 바로 그 목육의 현장으로, ‘삼림 자원의 순환 이용을 확립해서 풍부한 환경을 차세대에 연결해 나간다’는 목표 아래 적극적으로 사업을 진행 중이다.
2000년대 초반 홋카이도에서 처음 소개된 목육은 아이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나무와 만나, 나무를 배우고, 나무와 산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나무장남감박물관은 어린 시절부터 나무를 일상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과 나무와 숲과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학습의 장임과 동시에, 지역의 대표적인 산업을 미리 경험함으로써 미래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지역 산업 육성의 기반을 다지는 키즈 캠프와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도쿠시마의 산과 숲에서 자란 목재들로 모든 공간을 장식한 박물관 안에는 일본의 전통적인 장난감과 완구들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다. 무게 약 1톤, 약 300그루의 도쿠시마 나무로 제작한 엄청난 크기의 입구 카운터와 42개의 도쿠시마 나무로 만들어진 아치형의 삼림터널을 지나면 왁자지껄한 아이들과 어른이들 그리고 나무가 혼연일체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
약 15개의 섹션에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보고, 듣고, 만지고, 만들고, 타고, 감상하고, 게임을 즐기고, 이야기한다. 어느 공간에서나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은은한 나무향을 맡을 수 있어 몸도 마음도 상쾌함을 유지한다. 도쿠시마시의 랜드마크인 미야마, 시코쿠 지방 최대의 하천인 요시노가와, 계단식 논 타나다전 등 도쿠시마현 내 다양한 자연·인류 유산들을 재현한 내부 인테리어는 여행자를 위한 볼거리이자 안내서이기도 하다.
‘장난감은 아이가 태어난 후 처음 접하는 예술’이라고 했다. 잠시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리고 나무가 궁금하고 친해지고 싶다면, 나무처럼 사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주저없이 나무장난감박물관으로 가자.
2. 일본을 물들인 ‘재팬 블루’의 본산, 아와 쪽염색 체험관 아이노야카타
‘아와아이(阿波藍)’, 과거 아와로 불렸던 ‘도쿠시마 쪽’은 도쿠시마를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진 가장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만큼 오랜 세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를 보면 완전히 대조되는 색상이 경기장을 반반 나눠 물들인다. 한국의 레드, 일본의 블루. 흔히 ‘재팬 블루’로 칭하는 그 색이 바로 도쿠시마에서 탄생했다.
일본 쪽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봉건시대부터 쪽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 섬유로 면이 보급되면서 염료인 쪽의 재배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요시노가와 강 하류 일대는 쪽 일색으로 물들 만큼 큰 발전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또한, 메이지 시대에는 재배 면적과 생산량이 전국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쪽의 발효 염액인 도쿠시마 산 스쿠모의 전국 점유율이 90%를 넘은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곳곳에 ‘아와 쪽 가게’라는 염색집 간판이 내걸렸고, 쪽, 스쿠모, 염색품을 판매하는 상인들은 도쿠시마 번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줬다.
비록 현대에는 쪽의 수요와 생산이 미미하지만, 이렇듯 도쿠시마현은 일본 최대의 천연 쪽 염료 생산지로 지금까지도 품질을 인정 받고 있다. 쪽의 잎을 말리고 물을 주며 뒤집기를 반복해 발효시킨 도쿠시마의 스쿠모 제조 기술은 국가 선정 보존 기술로 보호된다. 완성된 염색품 뿐만 아니라 쪽 염료를 만드는 공정 자체를 독립된 전통 기술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쿠시마 북부를 동서로 흐르는 요시노가와 강의 하류 북쪽 기슭 지역인 아이즈미초에 위치한 아이노야카타는 이런 도쿠시마 쪽의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역사관이자 체험관이다. 찬란했던 아와아이의 전성기 시절 모습, 각 공정을 재현한 전시, 상인들의 생활상 등 다양한 전시품들과 함께 한 거상 가문의 흔적들도 전시를 통해 돌아볼 수 있다.
오쿠무라 가문은 겐로쿠 시기 이후 쪽 사업을 이어갔고, 메이지 6년에는 도쿄의 후카가와에 지점을 두고 주변국까지 판로를 확대했다. 1808년 경 현재 남아있는 안채가 새롭게 지어질 당시 상업적으로 정상 궤도에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이후 주조업을 병행하며 적극적으로 경영을 이어 나갔고 후세에 수만 점에 이르는 문서를 남겼는데, 11대 당주인 오쿠무라 다케오씨가 가문의 저택과 문서들을 아이즈미초에 기부하며 지금의 아이노야카타가 개관할 수 있었다.
아이조메(쪽 염색) 체험도 가능하다. 쪽풀에서 추출한 천연 인디고 색소로 천 등을 염색하는 기술이다. 손수건, 레이스 손수건, 실크 스톨 등을 쪽으로 물들여 나만의 도쿠시마 기념품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 체험장을 소개해준 장인과 악수를 나눴다. 남색으로 물든 그의 손은 손금조차 느낄 수 없이 매끈매끈했다. 일본을 물들인 최고의 쪽빛을 만난 순간이다.
3. 양조장 투어, 혼케 마츠우라 주조
1804년 혼케 마츠우라 주조는 문을 열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센코쿠 시대에 걸쳐 일본에서 가장 큰 수군으로 알려진 마쓰라 48당 중 한 파벌이 혼케 마츠우라 주조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그 중 일부가 에도 시대 초기 아와(도쿠시마)로 건너와 상인으로 활동했다. 도쿠시마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양조장의 창업자는 인근 사누키 산맥의 아름다운 연꽃밭과 우아한 황새 무리, 야마다니시키 벼농사에서 영감을 받아 술 양조를 시작했다고 전한다.
옛 선조들의 위상과 함께 약 220년 이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자부심이 그들의 술 안에 오롯이 녹아있다. 그들의 시그니처 브랜드인 ‘나루토타이’는 도쿠시마의 한 장르를 대표하는 술로 기록되어 왔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나루토타이는 소용돌이로 유명한 나루토해협에서 많이 잡히는 도미를 뜻한다.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고 헤엄치는 도미는 이 지역의 별미로 잘 알려져 있고, 마츠우라 주조는 나루토 도미 요리와 완벽한 페어링을 이루는 술을 만들겠다는 목표에서부터 나루토타이의 양조를 시작했다.
마츠우라 주조의 사케는 풍부한 감칠맛과 산미의 균형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우수한 기술로 세밀하게 정미하고, 최근 각광받고 있는 도쿠시마현 산 효모에 집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들의 사케는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개성적인 뉘앙스를 선보인다.
양조장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감상하는 홍보 영상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자신들의 술을 또 다른 측면에서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다음날 아침까지 숙취가 남기도 하고, 마셨을 때의 달콤한 느낌이 취향이 아니어서 오랜 세월 이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바로 나루토타이입니다” 라고. 지금 그들의 사케는 달콤한 과일 향이 풍부하면서도 특유의 드라이함이 기분 좋은 조화를 이뤄낸다.
국내 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소개되며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한 마츠우라 주조가 있는 지역은 고풍스러운 옛 마을의 모습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마츠우라와 비슷한 시기 문을 연 간장 공장을 비롯해 몇몇 유서 깊은 집들이 여전히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마츠우라 주조의 고택 대문 앞에는 오묘한 장식물이 걸려있다. 삼나무 잎으로 만든 일본 사케 양조장에서 볼 수 있는 전통 장식 ‘스기타마’다. 매년 첫 술인 신주를 짜낼 때 새로운 스기타마로 교체한다. 그 해의 술이 잘 빚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는 스기타마는 처음엔 초록색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갈색으로 색이 변해간다. 양조장 안에는 그 세월을 지켜온 스기타마들도 전시되어 있다.
220여년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물들을 돌아보고 나면 드디어 이곳의 술을 시음할 수 있다. 스텝의 진행에 따라 4-5가지 술을 종류별로 맛보면서 쌀을 깎아낸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질감과 첨가된 과일 등에 따른 맛과 향의 차이를 하나씩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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