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내 여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느니, 무엇을 배우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느니 하는 말은 그냥 말일 뿐. 의기소침해진 노인들에게 힘을 보태려는 격려겠지만 의욕은 체력에서 나오고, 공부를 하는 데는 밝은 눈과 유연한 관절, 영롱한 뇌세포도 필요하다.
나이 탓이 제일 쓸데없음을 알고는 있어도 앉고 설 때마다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게 되니 초고령사회는 ‘고령이’가 듣기에 무서운 말이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서도 심리학을 공부할걸, 요리를 배워둘걸, 운동을 더 많이 할걸…. 아리송한 후회들을 한다.
되돌아보면 직장을 다니다 보니 집안일보다는 밖의 일이 우선이었고, 시간 배분에서도 나 자신과 살림에는 소홀했다. ‘시간이 나면…’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종종거리며 살았는데, 시간이 많아진 노년에도 그 버릇이 남아 있어 시간을 깨알같이 쪼개 쓰려는 강박이 조금 있다.
모든 일에는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투자가 필수다. 번갯불에 콩 볶듯 해서 될 일이 있고, 수십 년을 공들여도 된 건지 안 된 건지 모를 일도 많다. 나에겐 음식 만드는 일이 그렇다. ‘요리’라고 말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 배워 본 적도, 공부한 적도, 시간을 투자해 잘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지만 나날이 잘해 보고 싶다는 ‘바람’만 강해지는 분야.
밖의 일을 할 때야 많이 안 해 봐서 못 하겠거니 위로가 됐지만, 삼시 세끼를 거의 제 손으로 해결해야 하면서도 왠지 음식 솜씨는 늘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이고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는데, 지식과 외식은 음식 솜씨와 상관이 없는 듯하다. 타고나는 ‘손맛’이 제일 중요해 보인다.
늘그막에 손주를 키우며 잘해 먹이고 싶은 욕망과 없는 솜씨 사이에서 마음이 많이 시달렸다. 손주는 입이 짧고 혀는 예민해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귀신같이 구분하는데, 어떻게 해 줘야 골고루 양껏 먹일 수 있을까. 아홉 살인 지금까지도 매일매일이 도전이다.
유치원을 다닐 때 일 년에 두세 번 도시락을 싸 가는 소풍이나 견학이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잠이 안 온다. 걱정도 되지만 ‘내가 언제 또 도시락을 싸 보겠어’ 하며 스스로를 부추긴다.
도시락 싸기에도 몇 가지 규칙이 있다. 가공식품과 일회용품은 되도록 지양하기, 음식물 쓰레기가 없도록 남기지 않을 만큼 싸기, 탄산음료 금지, 과일과 채소 먹기. 규칙과 더불어 도시락이니 물기가 없어야 하고, 상해서도 안 되고, 게다가 예쁘게 싸 보내고 싶으니 고려할 것이 너무 많다.
김밥이 가장 좋지만 안 먹는 채소가 많아 이것 빼고 저것 빼면 김밥이라 할 수도 없는 김밥이 되고 만다. 아이를 키울 때는 급식 과도기 시대라 점심 도시락을 몇 년씩은 싼 것 같은데, 딸 둘이 식성이 좋고 편식을 안 해서 아침에 시간이 문제였지 반찬 걱정은 없었다.
‘도시락 싸기 유튜브’는 아무리 봐도 할머니의 기만 죽일 뿐, 없는 솜씨를 만들어 주지는 못해서 적당한 크기의 도시락을 산 후 몇 가지를 시뮬레이션해 본다. 두 칸짜리는 너무 성의 없어 보이고, 네 칸은 채우기가 막막하고. 싹싹 비우게 하려면 햄을 넣은 볶음밥이겠지만, 선생님들이 보기에도 그것은 ‘민망한 도시락’이다.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하는 요리를 얼렁뚱땅 마음 졸이며 하게 되면서 ‘역시 세상에는 공짜가 없어….’ 그래도 나에게는 ‘말솜씨’라는 것이 있어서 “할머니가 정성껏 만들었으니까 맛있게 먹고 와!” 하고 말로 천 냥 빚을 갚아 본다.
착한 손주는 싹 비운 도시락을 들고 왔다. 선생님들이 남긴 것을 버려 주셨을 것 같지만, 손주는 그것까지는 모르는 듯 맛있었다고 할미를 기쁘게 해 준다.
여성경제신문 이수미 전 ing생명 부지점장·어깨동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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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미 전 ing생명 부지점장·어깨동무 기자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잡지사와 출판사 등에서 오랜 시간 취재 및 편집 업무를 담당하며 콘텐츠 전문가로 활동했다. 은퇴 후 손주의 육아를 전담하게 되면서 겪는 현실적인 고충과 그 속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행복을 담은 <할머니의 황혼육아> 를 집필하고 있다. 할머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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