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이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시대로 빠르게 전환되면서 차량은 더 이상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바퀴 달린 컴퓨터'로 진화하고 있다.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와 상시 연결성은 성능 향상과 유지관리 혁신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사이버 공격과 개인정보 유출, 공급망 리스크, 국가 안보 문제라는 새로운 과제를 낳고 있다. 이에 비즈니스플러스는 글로벌 완성차 업계와 주요국 정부, 국제기구의 대응을 바탕으로 자동차 전자화가 가져온 구조적 변화와 잠재적 위험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자동차가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진화하면서 사이버 보안은 더 이상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세계 각국 정부의 관심도 차량 성능에서 보안 체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과거에는 자동차 안전이 충돌시험과 제동거리, 차체 강성 등 물리적 성능으로 평가됐다면 이제는 차량이 외부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하게 보호되는지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확산, OTA 기술 보편화가 맞물리면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차량이 인터넷과 상시 연결되고 각종 클라우드 서비스를 활용하는 구조가 일반화되면서 사이버 공격이 현실적인 위험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은 최근 몇 년 사이 자동차를 국가 핵심 인프라의 일부로 분류하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에너지와 통신망처럼 자동차 역시 사회 기반 시스템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만큼 보안 문제가 산업 차원을 넘어 국가 안보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이른바 '킬 스위치'(Kill Switch) 가능성이다. 킬 스위치는 특정 차량 또는 차량군의 기능을 원격으로 제한하거나 정지시키는 기능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도난 방지나 긴급 안전 조치 등에 활용될 수 있지만, 만약 이러한 기능이 악의적으로 이용되거나 시스템이 외부 공격을 받을 경우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할 수 있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지난해 11월 노르웨이 대중교통 운영사 루터(Ruter)가 진행한 전기버스 보안 점검은 이러한 논의를 촉발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회사 측은 시험 과정에서 외부 통신망을 통해 차량의 일부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제조사가 의도적으로 차량을 제어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원격 연결 구조 자체가 새로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업계에선 실제 공격 사례와 잠재적 위험 가능성을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차량 제어 시스템과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분리하고, 암호화와 인증 기술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차량이 외부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구조 자체는 새로운 공격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보안 투자가 지속적으로 요구된다는 분석이다.
자동차 공급망에 대한 우려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생산되는 자동차 한 대에는 수천 개의 부품과 수백 개의 반도체가 사용된다. 운영체제와 통신 모듈, 각종 센서 역시 다양한 국가와 기업의 기술이 결합돼 만들어진다. 이처럼 공급망이 글로벌화될수록 특정 부품이나 소프트웨어의 취약점이 전체 차량 시스템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커진다.
미국기업연구소(AEI)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자동차 산업 역시 반도체와 통신 장비처럼 공급망 보안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보고서는 차량 내 특정 외국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보안 검증을 강화하고, 차량이 수집하는 데이터의 종류와 저장 방식을 보다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최근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도 맞물려 있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통신장비뿐 아니라 커넥티드카와 차량 데이터 역시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분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자동차가 생성하는 데이터의 성격도 이러한 우려를 키우는 요인이다. 커넥티드카는 GPS를 통한 위치 정보뿐 아니라 주행 경로, 차량 속도, 충전 이력, 운전 습관, 음성 명령, 차량 내부 카메라 정보 등 다양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한다.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할수록 차량 주변의 도로 환경과 보행자, 건물 정보까지 고해상도로 수집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보안 전문가들은 이러한 데이터가 적절하게 보호되지 않을 경우 개인정보 침해를 넘어 국가 차원의 정보 수집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군사시설이나 국가 주요 기반시설 주변을 반복적으로 운행하는 차량이 축적한 위치 정보와 영상 데이터는 개별적으로는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있지만, 대규모 데이터가 결합될 경우 예상치 못한 정보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이러한 방식의 악용 사례가 광범위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과 유럽이 차량 데이터 관리와 해외 이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잠재적 위험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자동차 생태계가 확대될수록 보안 관리 대상도 차량 자체를 넘어서는 추세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차량 공유 플랫폼, 클라우드 서버, 디지털 키 서비스 등 수많은 외부 시스템이 차량과 연결되면서 이른바 '서드파티 리스크'도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의 보안 수준이 높더라도 연결된 외부 서비스 가운데 하나에서 취약점이 발견될 경우 전체 시스템으로 위험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이 때문에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차량뿐 아니라 충전 사업자와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소프트웨어 개발사까지 포함한 보안 생태계 구축에 투자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국제 규제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는 신차 판매를 위해 사이버보안 관리체계(CSMS)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관리체계(SUMS)를 갖추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국제 표준인 ISO/SAE 21434는 차량 기획부터 설계, 생산, 폐기 단계까지 전 주기에 걸쳐 보안을 적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세계적인 완성차 생산국이자 자동차 부품 수출국인 만큼 SDV 경쟁력 확보와 함께 사이버 보안 역량 강화가 필수 과제로 꼽힌다. 최근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차량 통합 운영체제와 중앙집중형 전자 아키텍처 개발을 확대하는 동시에 보안 전문 인력 확보와 침해 대응 체계 구축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증권가에선 앞으로 자동차 기업의 기업가치 평가에서도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뿐 아니라 보안 기술력이 중요한 요소로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차량의 연결성이 높아질수록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는 보안 체계를 구축하는 기업이 장기적인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산업은 지금 '기계 제조업'에서 '디지털 플랫폼 산업'으로 이동하는 전환기에 서 있다"며 "OTA와 SDV는 자동차의 기능과 서비스를 끊임없이 진화시키는 기반이 되고 있지만, 동시에 사이버 보안과 데이터 주권, 공급망 안정성을 새로운 경쟁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연결성을 얼마나 안전하게 관리하고, 이용자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지가 미래 자동차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 여부를 결정할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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